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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의 나팔수가 되렵니다 - 강잠분

2011.09.07 15:19

조회 수:1792 추천:1



사명의 나팔수가 되렵니다

강잠분 사모



개척 목회의 길
모태신앙으로 자란 나는, 21세에 당시 불신자였던 남편을 만나 결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험난한 여정에서 타락하지 않도록 성령님의 강한 능력으로 붙드셨고 삼남매를 기르던 중 남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신앙은 날이 갈수록 깊어갔고 해가 거듭될수록 사명감에 불붙다보니 학습과 세례는 물론, 한걸음 나아가 모든 절차와 과정을 거쳐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5남매가 된 자녀들과 함께 일곱 식구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무작정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개척 목회의 길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되돌아보면 후회는 없습니다. 다섯 번의 목회지마다 숱한 간증이 있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일예배에 들어와 술주정을 부리며 목사님을 욕하던 분들이 임종 전에는 꼭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확실하게 천국 가는 모습을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귀한 복음 전하는 길에 불러 주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며 부족한 자를 개척 목회의 사모로 쓰심에 감격과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자족하는 삶의 훈련
어렵고 힘든 사역 훈련을 통해 가난함과 부함에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지만 자녀들에게는 죄스럽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식량이 떨어지면 굴뚝에 연기라도 내기 위해 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때면서 “애들아, 나가 놀다가 사람들이 묻거든 밥 먹었다고 하거라.” 하면 “예” 하고는 나가서 씩씩하게 잘 놀아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이웃 교회 권사님이 야근을 마치고 주무시는데 ‘임 목사 쌀통에 양식이 없으니 쌀을 채우라’는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고 하시며 마루에 ‘쿵’하고 쌀자루를 내려놓고 가십니다.

상여 메던 날
첫 개척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당시 함께 예배드리던 가정이 있었는데 어머니와 다섯 식구만 교회에 나왔고, 간암 말기 환자였던 남편은 불신자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분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권유하곤 했는데, 뜻밖에도 어느 수요일 밤 예배에 참석을 하셨기에 온 교회가 기뻐하며 환영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불과 이삼일 뒤 깊은 밤 전화벨이 울리고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른 가서 임종예배를 드리고 장례문제를 의논하니 가족들이 교회 장으로 장례지내기를 원했습니다. ‘성도라곤 고작 열 명 정도인데 교회장이라니…’ 남편이 당황하자 “목사님 염려하지 마세요.” 하고는 주일학생과 중고등부 학생까지 총동원하여 밤새워 십자가 꽃상여를 만들었습니다.
금요일에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주일 날 해야 했지만, 남은 가족들이 신앙심이 깊지 않아 설득하기 힘들고 여의치 않았기에 주일예배 시간을 앞당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곱 시에 예배드리고 장례식을 거행키로 했지만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지역 유지라서 마을 친구들이 심하게 반대하며 교회장과 사회장으로 하자고 했지만 우리는 한마디로 절대사절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분들이 친구 마지막 가는 길이라며 상여를 자기네가 멘다고 하자 조건을 걸었습니다. 평지를 갈 때는 목사부부와 온 교회 성도들이 메고, 산에 올라갈 때는 친구들이 메는데 상여 출발부터 발인, 하관까지 모든 장례 절차를 마치는 동안 상 차리고 제사하는 일을 일절 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으로 모든 순서를 마쳤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밖에 나가니 이웃 사람들이 교회 식구가 적었기에 도움을 요청할 줄 알고 기다렸지만 참 잘 했다며 칭찬을 하십니다. 이 모든 일을 잘 마무리 한 것은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이 이끌어 가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두 번째 개척지 영월에서의 일입니다.
은행에 근무했던 강 집사님은 결혼 전 대구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부유한 가문에서 자란 분입니다. 그런데 광부인 불한당 남편과 결혼하여 가난하게 살며 굶기를 밥 먹듯하고 정신적인 질환까지 앓았습니다. 하지만 집사님은 그런 중에도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남편이 알코올 중독자에 일까지 못하게 되자, 교회 가면 죽이겠다고 아내를 협박하며 목사님도 죽인다며 소리 지르고, 나중에는 교회를 뒤집어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평소 흑인이 무색할 정도로 새까만데다 수수깡처럼 말라깽이이던 그분은 결국 죽음을 앞두고 목사님을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연락을 받고 가보니 퉁퉁 부은 얼굴에 말하는 발음까지 확실치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 “이 선생님,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하고 평소에 목사님 욕한 것, 아내에게 욕하며 저지른 잘못과 죄를 다 회개해야 천국 갑니다. 모두 회개하세요.”하자, 지금까지 잘못한 모든 죄를 다 회개하고 있다고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분은 예배를 드리고 온 다음 날 아침에 돌아가셨는데 임종 예배 때 보니 시신은 부드럽고 얼굴은 광채가 났습니다.
마을 이장님은 그 집이 외딴집인데다가 미운 짓을 많이 하여 아무도 안 갈 것 같으니 거적에 싸서 버리라고 합니다. 목사님과 의논하여 장례식장을 교회마당으로 옮기고 밥솥, 국솥을 걸고 성도들이 장례를 치르다 보니 외면하던 사람이 하나 둘 모여들었습니다. 목사님이 나무를 얻어다가 관을 짜고 있는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모른 체하던 친척들이 속속 올라와서 모자라면 얼마든지 사올 테니 비용을 아끼지 말고 마음껏 대접하라고 합니다.
거적자리 장례를 호화판 장례식으로 마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남은 돈 수십만 원을 자녀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 자녀들은 그 사건을 계기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지금도 연락하며 지냅니다.

기적을 이루시는 하나님
네 번째 목회지는 정선 자북 한셈교회였습니다.
개척한 목사님께서 울산으로 가시고 남편에게 후임으로 올 것을 권했으나 우리 부부는 가시는 목사님께 개척 자금을 드릴 수 없는 것이 고민이었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5백만 원을 드리기로 하고 날짜를 정하였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다시 17일을 연장하여 기도하던 중 기적적으로 하나님께서 연결하신 분을 통해 부족한 금액을 채우고 약속한 날 정확하게 목사님을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명의 나팔수가 되고자
1992년 6월 6일, 충남 서천에 정착했고 지금까지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월세를 내기보다는 이 땅을 사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1993년 8월 2일부터 꼬박 4개월 동안 전국을 돌며 구하고 찾고 두드렸는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지 203평을 구입하고 또 기적적인 방법으로 채우셔서 완불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꿈과 비전이 내 안에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끼며 생명 있는 동안에 사명의 나팔 불기를 소망합니다. 이곳에서 비전 가운데 기독교 학교 공동체를 세워 2007년 11월 13일부터  사감선생이란 직책으로 부부가 근무하는 동안, 2009년 2월 28일까지 4회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하셨습니다. 졸업 앨범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한지 모릅니다. 또한 2007년 10월부터 병원선교를 하면서 호스피스 역할도 감당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하나님 은혜와 혜택을 너무 많이 받은 자입니다.
“주님, 이 삶 드리오니 뜻대로 쓰시옵소서.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립니다.”    

글/강잠분 사모
충남 서천 기도원 ‘예수사랑 좋은 쉼터(구 대한 예수교 장로회 금랑교회)’ 사역을 하던 중 2008년 12월 화재로 지금은 두 대의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며, 재건과 새로운 비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강잠분 사모는 영혼사랑의 열정으로 병원선교에 힘을 쏟고 있으며, 가족으로 남편 임종식 목사와 3남 2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