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아내 카타리나와 종교개혁 - 박명수
2012.01.11 16:43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와 종교개혁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루터의 종교개혁과 가정개혁
1517년 10월 30일, 루터는 95개 조항을 내걸고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다. 이것을 통해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총을 재발견하게 되었고,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성경의 진리를 재천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루터의 개혁은 단지 종교개혁만이 아니었다. 그의 종교개혁은 성직자의 가정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는 개신교 생활 전체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일부 천주교는 루터가 성욕을 이기지 못해서 결혼했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을 개인의 스캔들로 축소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과는 매우 다르다. 1517년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가 결혼한 것은 1525년이었다. 만일 결혼을 위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면 종교개혁을 일으킨 다음에 8년이나 기다릴 이유가 있었을까?
종교개혁 당시 결혼이 중요한 이슈가 된 것은 사실이다. 천주교는 구원을 얻으려면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고, 이 때문에 중세시대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확보하는 지름길로 수도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루터 또한 이러한 이유로 수도원에 들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 가운데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는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구원의 길은 수도원에서 죄 없이 독신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진리가 그에 의해 밝혀졌다. 이렇게 되자 수도원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났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박차고 나온 것이다. 독신생활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면 수도원에서 썩혀 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무척이나 바빴다. 그는 교황과 싸워야 했고, 제후의 지지를 받아야 했고, 젊은이들에게 종교개혁의 정신을 가르쳐야 했다. 이 모든 것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당시 인쇄술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루터는 밤낮으로 글을 써서 출판하였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루터가 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중매하는 일이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자 많은 수도사와 수녀들이 수도원에서 탈출하였다. 또 신부들도 더 이상 독신생활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독신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던 성직자들에게 결혼이라는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루터는 수도원을 탈출한 수녀들에게 열심히 신랑감을 소개해 주었다. 대부분의 신랑감은 천주교에서 개신교로 전향한 성직자들이었다. 이렇게 결혼한 개신교 부부들은 확고한 개신교 지지자가 되었다. 루터는 중매를 통해서 개신교의 세력을 확대해 나갔던 것이다.
루터의 결혼과정
그러면 루터는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나? 사실 루터 자신은 결혼하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은 개혁자로서 언제 사형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결혼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만 결혼시키는 데서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이 루터의 신앙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즉, 루터가 개혁자로서 확신이 없어서 결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루터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천주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결혼으로 그것을 입증하라.”고 요구했다. 이제 루터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는 결혼함으로써 자신이 개신교인임을 입증해야 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루터는 수녀원에서 나온 수녀들에게 신랑감을 소개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한 수녀가 남았다. 그 이름은 카타리나 폰 보라였다. 루터가 여러 사람을 소개하여 주었지만 그녀는 거절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루터가 어떻겠냐고 물었고 카타리나는 좋다고 대답하였다. 당시 루터는 부모님으로부터 손자를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결국 노처녀도 구하고, 부모님의 청도 들어주며, 아울러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기도 할 겸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
일단 결혼이 결정되자 루터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6월 10일에 결혼을 결정하자마자 그 달 13일에 약혼식을 하고 27일에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루터의 제자들은 이것이 혹시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약혼기간을 길게 잡으면 어떨까 제안을 하였다. 여기에 대한 루터의 대답은 “노(NO)”였다. 루터는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늑장을 부리다 한니발은 로마를 잃었다. 늑장을 부리다 에서는 장자권을 빼앗겼다. 그리스도께서도 ‘너희들이 나를 찾겠으나 발견하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지. 그러므로 성경, 경험, 만물의 모든 이치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선물은 그것이 날아들어 올 때 당장 받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대답하였다. 노총각 루터는 서둘러서 결혼하였다.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필자는 기독교의 역사상 가장 결혼을 잘한 사람이 루터라고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젊은 날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존 웨슬리는 수많은 좋은 여자를 놓치고 의부증이 있는 여자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루터는 카타리나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으며 그의 가정은 독일인들의 모델이 되었다.
카타리나의 어머니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타리나를 수녀원에 맡기고 재혼하였다. 카타리나는 수녀원에서 살림하는 것을 배웠고 결혼 후에는 알뜰하게 살림을 하였다. 하지만 루터는 씀씀이가 헤펐다. 루터는 “내가 노랑이 욕을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빚을 갚기 위해 고생하는 것은 카타리나 몫이었다.
또한 루터는 항상 병을 달고 살았다. 통풍, 불면, 감기, 치질, 변비, 결석, 현기증, 그리고 도시의 모든 종소리가 들리는 귀 울림 등이 그를 괴롭혔다. 카타리나는 약초, 찜질, 마사지에 능했다. 그의 아들은 카타리나를 반(半) 의사라고 불렀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서 불면증에 좋다는 맥주를 만들었다. 사실 루터는 알뜰하게 자신을 보살피는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루터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보다 아내를 더 사랑하고 있다. 사실은 그리스도가 날 위해서 하신 일이 더 많은데 말이야.”
루터의 가정도 일상적인 가정의 모습과 비슷했다. 루터의 집에는 항상 루터로부터 배우려고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루터는 종종 대화에 몰입한 나머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루터는 식사 시간에 학생들과 대화를 즐겼고 이것은 「식탁대화」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어느 날 루터는 한 학생의 질문을 받고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루터가 잠시 쉬는 틈을 타서 “박사님! 그만 이야기하고 식사하시죠.”라고 말했다. 그러나 루터는 여자가 남자의 대화에 간섭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여자들은 입을 열기 전에 주기도문을 외우든지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밥도 먹지 않고 일어나 버렸다. 카타리나는 남편의 건강을 먼저 생각했고, 루터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루터의 결혼관
루터는 성직자가 결혼해야 하는 것을 인간의 성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개중에는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독신은 인생의 커다란 장애물인 것이다. 루터는 독신생활이 오히려 간음을 조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신부와 수녀가 같은 성당에서 일하면서 아무 일이 없을 수 없다.”라면서 “나무와 성냥을 함께 놔두고 타지 마라.”는 것은 비상식적이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으로 루터는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반대하고 결혼생활을 지지했다. 결혼생활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루터 자신이 결혼하고 가정생활을 하면서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그가 실제로 가정생활을 하면서 가정에는 단지 성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가장은 죽을 때까지 가정의 빵을 걱정해야 하며, 아내는 임신의 순간부터 고통을 받기 시작한다. 가정에는 온갖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가정생활이야말로 진정으로 신앙을 시험해 보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루터는 가정생활과 수도원생활을 비교해 보았다. 사실 가정과 비교해 보면 수도원은 너무나 단순한 삶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일하면 된다. 사실 수도원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은 매우 쉽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유혹이나 탐심이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정은 그렇지 않다. 가정은 돈이 없으면 안 되고, 아내의 욕구도 만족시켜줘야 하고, 아이들도 교육시켜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은 인내와 신앙이 요구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진정한 훈련은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수도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누가 못하겠는가? 하지만 아내가 잔소리를 하고, 아이들이 울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이 진정으로 훌륭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루터는 가정이야말로 인격을 수련하는 최상의 장소라고 보았다.
루터는 가정에서 온갖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부싸움은 아담부터 지금까지 있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루터는 여기에서 귀한 진리를 배웠다. 그것은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루터에게 가정의 많은 문제는 낙심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게 만드는 희망의 근거였던 것이다.
또한 루터는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첫사랑이란 술 취한 것과 다름없다. 술이 깨고 난 다음에야 진짜 부부애가 싹튼다.” 루터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충고를 받아들였다. 신부에게는 “얘야, 밤에는 즐겁게 남편이 현관에 들어서도록 하거라.” 신랑에게는 “네가 출근하는 것을 아내가 아쉬워하도록 하거라.”, “가장 멋진 인생은 하나님을 믿고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아내와 더불어 한마음이 되어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라고 조언하였다. 하루는 카타리나가 아파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가 있었다. 루터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오! 카티!(카타리나의 애칭) 날 두고 죽으면 안 돼.” 루터는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루터의 일생은 파란만장했다. 하지만 루터가 피곤하고 힘들 때 가정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루터는 중세 천 년 동안 가장 축복받은 성직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루터 자신이 아내와 자식이 있고 쉴 가정을 가진 첫 번째 성직자였기 때문이다. 루터는 힘든 사역에 대해서 불평하다가도 자신이 받은 축복을 생각하고 감사를 드렸다. 루터에게 가정은 풍랑 가운데 피난처였다.
루터의 가정과 오늘의 기독교
루터는 성직자에게 가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루터가 만든 변화 가운데 목사관의 변화도 결코 작지 않은 변화였다. 그는 목사관에 여자가 살 수 있게 하였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없애버린 실질적인 일이었다.
천주교는 독신제도를 통해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였다. 성직자는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평신도보다 우월하고, 따라서 평신도는 무조건 성직자에게 순종해야만 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 가정을 가지고 있다.
천주교가 결혼을 금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아내와 가정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아내를 즐겁게 하고 자식을 먹여 살리려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수 없으므로 전적인 헌신을 위해서는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목사가 가정을 갖지 않으면 사역을 하기 힘들다. 많은 경우 사모가 사역의 방해가 되기보다는 사역의 동역자가 된다. 훌륭한 목사 뒤에는 거의 예외 없이 훌륭한 사모가 존재한다. 이점이 천주교와 개신교가 서로 다른 점이다. 천주교는 결혼을 성직에 방해물로 생각하는 반면, 기독교는 결혼을 성직의 필수요소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결혼이 성직에 장애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성직에 대한 소명이 없이 성직자와 결혼한 경우,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모는 하나님의 사역에 걸림돌이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목사의 가정은 이런 부정적인 방향이 나타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직자의 결혼은 자신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일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성직에 들어서려는 사람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정말로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려는 소명과 그런 자세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글/ 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보스턴대학교, Ph.D)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를 통해 후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를 창립하여 복음주의와 한국교회사, 특히 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 정립에 공헌하고 있다. 미국의 하버드신학대학원, 드류대학교 대학원, 예일신학대학원 등에서 연구 및 강의 등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 문화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박명수 교수(보스턴대학교, Ph.D)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를 통해 후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를 창립하여 복음주의와 한국교회사, 특히 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 정립에 공헌하고 있다. 미국의 하버드신학대학원, 드류대학교 대학원, 예일신학대학원 등에서 연구 및 강의 등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 문화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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