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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을 세우는 눈물 - 김선희 사모

2011.07.22 15:50

조회 수:1944 추천:2



‘한 영혼’을 세우는 눈물

- 김선희 사모(청주 꿈이있는교회)




백치 사모
나는 준비된 사모가 아니라 만들어진 사모이다. 모태 신앙이지만 신앙적인 것을 보고 자란 것이 별로 없어서 사모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무지한 사람이었다. 평생 같이 공부할 사람 만나 살면 좋겠다는 막연하고 환상적인 꿈을 가지고 있었을 뿐, 결혼 후 남편이 신학을 한다고 했을 때 그저 남편이 공부한다는 것만 좋아했지 내가 사모가 된다는 것은 까맣게 몰랐던 백치였다.

준비되고 아는 것이 많았다면 이 길을 갈 수 있었을까? 아무 준비도, 아는 것도 없이 들어선 사모의 길은 시작부터 험난하기만 했다. 아이 넷을 연년생으로 낳아 양육하며,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하랴, 직장생활 하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 남편은 결손가정의 청소년 30여 명의 캠프를 인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어른 하나 없는 ‘청소년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복지관 지하 귀퉁이에 10평 남짓한 창고 방을 허락받아 시작한 ‘건물 없는 교회’였다. 성도는 우리 집 자식 네 명과 열악한 환경의 청소년 몇 명이 전부였다. 이때부터 나에게는 ‘인격의 전쟁’과 함께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믿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청소년이 늘어난 것 외에 달라진 것이라고는 없는 목회 4년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직장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요청과 인도하심으로 ‘밥줄’인 세상 직장 -17년간의 교직 생활을 버리고 남편의 목회 현장에 함께하게 되었다.

‘한 영혼’ 철학에 눈을 뜨다
직장을 그만두고 목회 현장으로 들어와 보니 이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직장 생활은 퇴근이라도 있다지만 목회의 길은 새벽부터 시작해도 끝이 없었다. 더구나 청소년 목회 현장에서 내 자식만 품고 따로 분리된 생활을 할 수가 없어 20여 명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다보니 사생활은커녕 우리 아이들의 상황도 말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방목되다시피 한 아이들을 위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회에 뛰어든 이상 무엇인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과, 자식 넷과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목숨 걸고 목회에 미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를 만나게 되었다. 세미나를 통해 목회는 이 길밖에 없음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고 ‘한 영혼’ 철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 자녀를 성도삼아 ‘새가족 교육’을 시작했다. 이것이 ‘한 영혼을 세우는 사역’의 시작이 되었다.
매주 요일을 정하여 월요일은 큰아이, 화요일은 둘째, 수요일은 셋째, 목요일은 넷째 아이를 만났다. 수업이 가장 많은 날을 택해서 하굣길 ‘자식 맞이’를 가는 것이다. 첫째와 둘째 아이가 중학교 1, 2학년, 셋째와 넷째 아이가 초등학생 때였다. 어려운 개척교회 사모 엄마이다 보니 선물은 ‘천 원 김밥 두 줄’이 전부였다. 차 안이든 잔디밭이든 공원이든 아이를 맞이하면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들어준 다음, 성경교재를 펼쳐놓고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런데 아이와 눈을 맞추며 대화하는 것이 여간 어색하고 쑥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남을 위해서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았고 남의 자식을 위해서는 많은 대화도 했건만, 정작 내 자식을 위해서는 이런 시간을 내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 제 자식을 살려주시옵소서.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직장에서 남의 자식은 잘 가르쳤는지 모르나, 정작 제 자식은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뼈아픈 기도를 이어가며 하나님 앞에서 ‘어미’로 다시 태어났다.

13주 동안 아이들을 돌아가며 말씀으로 가르치다보니 모자간 회복의 시간이 되었고 더불어 나의 신앙도 새롭게 세워져 갔다. 자녀교육에 눈을 떠가며 남편이 하는 ‘청소년 제자훈련’ 속에 들어가 말씀을 배우고 또 배웠다.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자녀들이 청년이 되었을 때 나는 훈련생인 동시에 가르치는 자가 되어 ‘청년 제자 양육’을 시작했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불평도 많았고 반항도 했다. 교육이 끝나면 밤이 깊도록 본당에 남아 자식과 뒤풀이 하듯 싸웠다. 긁혀 헤집어진 마음을 안고 하나님께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제가 자식을 잘못 키웠습니다. 자식의 상처를 말씀으로 만져주소서. 이제 내 자식을 가르치지 못하면 남의 자식 가르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살았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은 “아이에게 잘못했다고 말해라.”, “미안하다고 말해라.” 하는 깨달음과 다음 훈련을 위한 지혜를 주셨다.’ 내 자녀를 먼저 말씀으로 교육하여 세우는 씨름을 하고나니 어느덧 자녀들이 최고의 동역자가 되어갔다.
자녀들은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둘째와 셋째는 총신대와 장신대 학생이면서 교회의 여러 사역을 감당하고 있고, 넷째 역시 교회에서 섬기다가 목회를 준비하기 위해 미국에 유학중이다. 어려운 목회 현실 속에서 아픔이 많다보니 “저는 이 길, 절대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했던 큰아들은 올해 장신대 신학과를 지원했다. 큰아들을 마지막으로 부르셨을 때 온 가족이 함께 울었다.

‘한 영혼’ 세우기에 미치다
자녀의 교육문제를 뛰어넘고 나니 이제는 어떤 사람도 품을 수 있었다.  
청소년이 오면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학교를 방문해서 가르치고, 대학생이 오면 대학 캠퍼스 잔디밭에 가서 가르쳤다. 장년이 오면 심방처럼 찾아가서 차를 마시며 교재를 가지고 대화했다. 한두 과를 배우다 떠나가는 성도가 대부분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 영혼’ 철학을 붙잡고 미친 듯이 말씀을 가르쳤다. 성도의 자녀들도 집 앞으로 찾아가 차 안에서 ‘말씀 과외(?)’를 해주었다. 어느 까다로운 성도의 집을 갔다 올 때는 “그만오라” 할까봐 그 집을 들고 날 때마다 문고리를 잡고 가슴 떨리는 기도를 했다. 이렇게 마음 졸이며 말씀을 가르친 성도가 지금은 순장이 되었다.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성도가 말씀으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러나 나보다 학벌이나 경제력이 좋아 보이고, 강하고 잘나 보이는 성도를 믿음으로 뛰어넘으며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실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렵고 불편한 성도가 ‘자녀’로 보일 때까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고, 하나님은 담대함을 주셨다. 차츰 나는 성도들을 세상의 신분으로 만나지 않고, 그저 ‘어미의 마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성도의 이름을 자식처럼 가슴에 품고 그 영혼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1년 전, 속 썩이며 교회를 떠난 성도가 있었다. 아내는 먼저 제자양육을 받았고 남편은 당시 제자양육을 받고 있었다. 성도 간에 사소한 일들이 얽히면서 일이 커져 이미 아내는 다른 교회로 가버렸고 집도 이사를 했는데, 주일마다 남편만 혼자 교회를 오며 제자양육을 끝까지 받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내는 절대로 교회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다. 집 앞을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길어지자 차츰 나도 그 성도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정죄의 마음과 함께 미움도 깊어지고 기도마저 하기 싫었다. 내 인격의 한계였다. 하나님 앞에서 나도 똑같이 고집부리며 서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말씀하셨다. “지금 너는 그를 ‘시어머니의 눈’으로 보고 있구나. 네가 ‘친정 어미’이면 그렇게 하겠느냐?” “야속한 하나님, 어떻게 이런 깨달음을 주시나요? 제가 졌습니다.” 화나는 마음이 녹아내리며 그 성도에게 다시 전화를 할 수 있었고 사랑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남편이 제자양육을 수료하던 날, 아내가 꽃다발을 들고 예배에 참석했다. “사모님, 잘못했습니다.” 그는 내 품에 안겨 울었다. 그는 현재 진행되는 여자 소그룹에 들어와 수료한 과정을 다시 배우는 겸손한 제자가 되었다. 이제는 내 마음에 미운 성도가 아무도 없다.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나의 눈을 바꾸어 주셨기 때문이다.

가슴에 묻은 ‘한 영혼’  
중학생 때 만나 청년이 되기까지 키운 영의 자녀 하나를 2010년 가을, 하늘나라로 보냈다. 오랜 시간 말씀으로 양육하여 키운 아이였는데 제자훈련 도중, 인격훈련이 잘되지 않아 중도하차를 하게 되었다. 제자훈련은 ‘머리훈련’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 앞에 ‘인격 씨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더구나 사역을 하던 아이여서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자식같이 키운 녀석이라 중도하차를 해도 상처받지 않고 잘 감당할 줄 알았는데…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는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그 아이가 그렇게 되기 전날 주고받았던 문자를 잊을 수가 없다. 마침 기도회가 있던 금요일 밤이었다. “사랑하는 딸아, 수년 전 너를 수련회에 데려가기 위해 오늘처럼 기도회가 끝나고 너희 집 앞에서 밤늦도록 너를 기다렸던 날이 기억난다. 어찌 이토록 어미의 마음을 모르더냐? 징계가 없는 자식은 ‘사생자’란다. 모자란 어미를 용서하고 이 사랑이 깨달아지는 날 돌아오너라.” “사모님, 저를 자식처럼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잘 지내고 있으니 기다리지 마세요. 사모님의 은혜 잊지 않고 잘 성장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문자였다.
바로 이튿날 저녁, 그 녀석이 아르바이트하던 음악학원에 불이 났고 그 아이는 학원생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후 그만 질식사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자식이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그 길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장례식장이 통곡의 바다가 되도록 목 놓아 울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더 품고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자식을 하나님께 보내고 돌아온 곳은 결국 하나님 앞이었다. 그 분 앞에 다시 엎드릴 수밖에……. 새벽예배 참석자 명단을 보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들이 다 네 자녀이니라.”’ “하나님, 육신의 자식 넷도 감당 못하여 절절매며 키운 저인데, 무엇을 보시고 저에게 이 자녀들을 허락하시나요?” 눈물로 질문했다.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게 하신다. 연년생으로 셋째를 임신한 것을 확인하던 날, 나는 죽고 싶었다. 임신인줄 모르고 이 약 저 약 먹은 것도 무서웠고, 산아 제한이 강조되던 당시, 나를 줄줄이 애만 낳는 미련한 여자로 바라보는 시선이 싫었고, 고상하게 잘 입고 잘 사는 직장 동료들 속에서 초라한 차림으로 해마다 배불뚝이로 사는 내가 싫었다. 그런 중에 다시 넷째를 임신했을 때, 죽고 싶어야 하는 현실인데 나는 강렬하게 살고 싶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남의 눈도 문제가 아니었고 초라한 옷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불뚝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나의 무엇을 보시고 넷째를 허락하신 것일까? 셋도 감당을 못하는 나에게 어찌 넷을… 이 모자란 나를 ‘어미 될 자’로 보시다니…….’ 그것이 감사하여 입덧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만삭이 되도록 자전거를 타고 새벽예배를 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배불러 낳은 자식도 속을 썩이지 않더냐? 네가 이제야 어미가 되었구나.” 사랑이 죽음같이 강한 것(아 8:6)을 알게 하셨다. “못나고 모자란 저를 어미 되게 하시고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더 속 깊은 어미가 되게 하소서. 앞서 간 자식을 위해서라도 영혼 세우는 일을 더 잘하겠습니다. 아버지, 저의 연약함을 도와주소서!”
그 분 앞에 오늘도 ‘한 영혼’을 세우기 위해 다시 엎드린다.


글/김선희 사모
청주 꿈이 있는 교회는 ‘평신도를 동역자로 세우는 제자훈련 목회’의 일념으로 청소년 목회를 시작하여 지금은 청‧장년이 균형을 이루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지고 있다. 김선희 사모는 반기성 담임목사의 아내로 슬하에 3남1녀의 자녀를 두었고, 모든 성도를 ‘어미의 마음’으로 섬기기를 소원하며 훈련사역을 감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