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지수
2005.05.28 17:57
사람과 사물에는 격(格)이 있다. 인권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되지만, 인격은 동등하지 않다. 인권은 창조주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이지만, 인격은 스스로 세워 가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인간됨의 격과 원균의 인간됨의 격이 어찌 동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안중근 의사와 이완용의 인간됨의 격은 결코 같지 않다. 사람됨에서 품격이 있다는 의미이다. 곧 인품(人品)이다.
어떤 이들은 학력지수와 인격지수를 동일시한다. 우리나라처럼 학력에 매달리는 나라에서 지식의 깊이가 인격지수의 상승작용으로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인성교육 곧 인품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현실을 볼 때 학력지수와 인격지수는 별 상관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많은 배움이 그 사람의 품격을 높이는데는 별무소용이라면 진정 배움의 가치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최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여러 가지 사건을 볼 때 그 사건의 중심인물이 알만큼 알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인 것을 안다. 다른 이들의 눈길을 끄는 그 위치, 그 자리까지 오른 이들이기에 그들의 잘 짜여진 학력과 경력 이력서는 한 장으로 모자랄 정도이다. 그런데 서민으로서는 견주기조차 어려운 그들의 화려한 학력과 경력이 사건을 교묘히 은폐하고, 진실을 가리는데 사용되는 현실을 본다. 또 다른 의미의 식자우환(識者憂患)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이들은 소유지수와 인격을 동일시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자체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많이 가진 자에게 무조건 관대한 사회현상이다. 상대에게 관대해지거나, 머리를 조아리는 이면에는 물신숭배(物神崇拜)와 배금사상(拜金思想)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소유와 인간됨은 등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됨에 하자가 발생할 때 그 손에 들려진 돈은 양약이 아니라 독약으로 변질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경험하면서도, 여전히 소유에 집착하는 아픔을 어찌 할 것인가? “사람 나고 돈 났지, 돈나고 사람 났나” 읊조리면서도 세태는 여전히 돈 나고 사람 났다는 쪽으로 기우는 현실을 어쩔 것인가?
어떤 이들은 직급과 인격을 동일시한다. 마치 직급이 인격의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호기를 부린다. 직급은 세월이 흐르거나 때를 잘 만나면 오를지 모르지만, 인격의 성숙은 의도된 과정과 훈련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룰 수 없다. 세상에는 깜짝쇼가 열리기도 하고, 역전의 드라마가 연출되기도 한다. 역전과 반전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제의 재벌이 오늘 알거지가 되기도 하고, 소시민이 심심찮게 대박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인격의 문제는 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침에 씨뿌려 저녁에 거둘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양한 만남과 시간 그리고 자기 절제와 노력이 투자되지 않으면 결코 인격의 성숙은 없다. 아파트 평수와 인격의 넓이가 비례한다는 어떤 증거도 우리 손에는 없다. 천재 예술가는 신동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격의 고매함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지지 않는다.
최근 중앙일간지 한 곳에서 우리나라 사회 품격지수에 대하여 연구 발표한 결과를 보면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내용인즉 우리사회의 품격지수는 100점 만점에 평균 36.6으로 나타났다. 전국 20세 이상 남녀 1,013명을 대상으로 설문하여 최저수치로 나타난 정치인 언어항목 32점과 최고수치로 나타난 방송토론문화항목 44점등을 평균한 결과가 36.6이었다. 50점을 보통이라 할 때 떨어져도 한참을 떨어진 수치였다. 우리 스스로 매긴 점수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OECD에 가입했다고 자동적으로 국민과 국가의 격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우리의 자랑 대전광역시 유성에 자리잡고 있는 유서 깊은 호텔커피숍이다. 호텔 입구 정면에는 무궁화 다섯 개가 반짝거린다. 특급호텔이라는 의미이다. 필자가 들어선지 30분이 지났는데도 찬물한잔 가져다 놓고, 아무 반응이 없다. 무엇이 필요한지 도무지 물어보지를 않는다. 필자는 다시 한 번 더 깨달았다. 호텔 벽을 찬란하게 장식하는 무궁화의 숫자가 결코 서비스의 내용을 결정짓지 않는 것이라는 평범하다 못해 떠올리기조차 싫은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외부로 보이는 것이 내면의 상태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의 정신이 외면을 결정짓는 것이란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크리스천이라는 타이틀이 기독교인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과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았기에 크리스천이라고 불리는 것이리라. 목사이기에 자동적으로(automatically)목사의 인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내가 나기에 비로소 목사의 반열에 서는 것이 아닌가. 품격있는 시민이고 싶다. 품격 있는 목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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