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작성일 | 2022-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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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cp=nv |
언론사 | 국민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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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이 신앙생활 지침으로 정한 가훈, 대대로 암송하며 실천
오정호 목사의 진국 목회 <3>
오정호(뒷줄 왼쪽 네 번째) 대전 새로남교회 목사가 1970년 중학교 1학년 때
부산 가야제일교회 학생회 임원들과 함께했다. 뒷줄 왼쪽 두 번째는 오정현 서울 사랑의교회 목사.
1963년 1월 1일 새해 첫날이었다. 부산 가야제일교회를 담임하던 아버지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했다. 내가 6살 때 일이다. “이제부터 너희들 교육과 신앙의 세대 계승을 위해 가훈을 발표하겠다. 너희들도 훗날 성장해서 이 가훈대로 가정을 잘 이끌어주길 바란다.”
가훈은 철저한 신본주의 가치관, 보수 개혁주의 신앙을 담고 있었다. ‘첫째,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둘째,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셋째, 이웃을 사랑하여 덕을 세우는 삶. 넷째, 범사에 감사하는 삶. 다섯째, 오직 성령충만하여 범사에 승리하는 삶.’ 이 가훈은 우리 4형제의 신앙적 지주가 됐다. 가정에 특별한 일이 있거나 명절 때면 모여서 자주 낭독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버지는 찬송을 즐겨 부르셨다.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산 밑에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별 주님 형언할 길 아주 없도다.” 그 영향은 우리 형제에게도 그대로 전수됐다. 지금도 80년 7월 가야제일교회 예배당에서 열린 아버지의 위임식 때 4형제가 앞에 나가 중창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특히 자주 불렀던 찬송이 있다. ‘내 진정 사모하는’(88장)과 ‘주 달려 죽은 십자가’(149장)다. 가족의 주제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가 모이면 한목소리로 화음을 넣어 같이 불렀다.
오정호 목사의 부친 오상진 목사가 가족들의 신앙생활 지침으로 만든 가훈
찬송가에 친숙했던 가풍은 큰형의 목회 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형님이 미국 LA 남가주 사랑의교회를 담임할 때나 서울 사랑의교회 ‘특별새벽기도회’(특새), ’내 영혼의 풀 콘서트’를 인도하는 모습을 보면 어릴 때 함께 부르던 모습이 그대로 나온다. 어릴 때 부모가 자녀를 앉혀 놓고 보여준 신앙 교육이 훗날 어떻게 나타나는지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아버지는 가정예배를 매우 중시했다. “얘들아, 가정예배 드릴 시간이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기도 시간마다 동포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간구하셨던 아버지의 기도제목이다.
“주여, 155마일 휴전선과 900마일 해상을 수호하는 국군들과 휴전선 너머 북한 동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심지어 사할린에 있는 동포를 위해서 기도를 드리곤 했다. 가정예배를 통해 온몸으로 나라사랑, 동포사랑의 중요성을 배운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우리 형제를 소집했다. “얘들아, 너희들이 꼭 가야 할 곳이 있다.” 도착한 곳은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묘지(현 재한유엔기념공원)였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있는 유엔군 묘지로 한국전쟁 중 전사한 4만896명의 이름이 벽에 적혀있다.
끝없이 펼쳐진 묘비를 보며 아버지가 물으셨다. “이들이 왜 여기에 잠들어 있는지 아느냐.” “6·25 전쟁 때 돌아가신 분들 아닌가요.” “풍전등화처럼 흔들렸던 대한민국은 혈맹 국가 젊은이들의 피를 통해 지켜졌다. 그러니 너희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결코 이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네, 아버지.”
아버지의 말씀 따라 나도 훗날 가족을 데리고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했다. 그때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와 조각상,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를 봤다. 아버지의 기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가슴이 뭉클했다.
‘그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는 힘은 낭만적인 이론에 있지 않다. 자유는 협정이나 정치적 이벤트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분투, 땀, 눈물과 피로 지켜진다.’ 2020년 대전 새로남교회가 6·25 참전 용사 76분으로부터 후손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 한국전쟁의 숨겨진 개인사와 가족사를 청취해 ‘용사는 말한다’를 발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70년대 들어 각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의 연합모임인 학생신앙운동(SFC, Student For Christ)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훗날 이 모임은 전국기독학생면려회(SCE, Student Christian Endeavor)로 이름이 바뀌었다. 형제 교회 학생들과 연합정신을 키우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전국기독학생면려회 활동을 하면서 교회 역사나 규모와 관계없이 벽을 넘어 상호 존중하며 격려하는 자세를 익혔다. ‘복음의 깃발 아래 서로 연합하는 것이 놀라운 축복이구나. 우리 교회라는 울타리에만 머물러선 안 되는구나.’
가야제일교회에서 74년 중고등부 학생회 회장을 맡으며 친구들과 회지를 내기 위해 원고를 모았다. 지금 보면 등사판으로 민, 볼품없는 소식지에 불과하지만 당시 문예활동을 하는 곳이 많지 않았기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긴 회지를 볼 때마다 감사함과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때는 부산 부전교회와 초량교회가 지역의 대표적 교회였다. 하계나 동계 수련회를 하겠다고 하면 예배당 공간을 선뜻 내어줬다. 지금은 많이 느슨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역사가 오래되었든 새로 개척한 교회든 주 안에서 형제교회라는 의식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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