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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표현 속에 감추인 보물

 

장경철 교수(서울여자대학교)

 

감사의 정의

인생은 우연히 내게 찾아온 것들을 곁에 오래 머물도록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곁에 찾아온 좋은 것들은 내가 내 힘으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누군가의 호의와 혜택에 의해서 내게 임대된 것들이었습니다.
추운 겨울 아침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던 중에 깨닫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왜 물이 따듯할까? 그 물에 열(熱)이 거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온수가 따듯함을 유지하는 것은 열이 지속적으로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샤워기에서 멀어질수록 그 물은 조금씩 차가워지더군요. 그때 내게 있는 축복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열이 뜨거운 물에 거하듯이, 내 생명과 재능과 혜택이 내게 거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 곁에 일시적으로 머무는 것들을 오래 머물도록 만드는 인생의 기술이 있을까요? 내게 찾아온 은혜와 축복이 쉽게 증발되지 않고 내 곁에 오래 머물도록 만드는 비결이 있을까요? 감사의 표현과 습관 가운데 그 비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란 무엇일까요? 감사란 내가 받은 것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그리 난해한 기술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것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어느 분과 감사의 정의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감사에 대한 정의를 듣더니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감사의 정의를 알게 된 후 제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감사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며, 감사를 표하지 않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감사하는 사람이 오히려 보통 사람이며, 감사를 표하지 않는 사람은 ‘죽일 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표현은 과격했지만 일리가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를 표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기 이전에 당연한 것이며, 감사를 표하지 않는 것은 무례한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듣기 원하신다

그런데 당연한 감사의 표현 속에 엄청난 혜택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인생은 당연한 것에 횟수를 더할 때, 당연치 않은 결과들이 초래되는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진정으로 형통의 비밀입니다. 형통할 때 우리가 감사를 표하면 형통함이 연장되며, 불행할 때 우리가 감사를 표하면 불행에 종지부가 찍히게 됩니다.
감사는 받은 것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는 공급자 하나님께 대한 자세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에게 선물을 무한히 공급할 의도와 능력을 갖고 계신 분으로 이해해 봅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선물과 혜택을 주고 또 주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분으로 하여금 선물을 더 많이 베푸시도록 우리 편에서 돕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전의 선물을 받았을 때, 감사의 언어를 건네는 것입니다.

거꾸로 생각해 봅시다. 평소에는 선물을 잘 주시던 분이 어느 날부터 선물을 더 이상 주지 않으십니다. 왜 그러시는가 하는 궁금함으로 그분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니,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주고 또 주어도 고마운 줄을 모르는구나. 감사의 마음이 회복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겠군!”

 

이제 이러한 질문을 던져봅시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사람이 가장 두드러질까요? 소위 ‘크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두드러질까요? 하나님 앞에서 두드러지는 사람은 큰 일을 하거나, 높은 지위에서 일하는 사람일까요?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확신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큰 일이라고 여겨질지라도, 어떤 일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리 큰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와 행위들은 대개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합니다. 어느 부분에서 봉사하나 다 비슷한 것입니다.
우리의 시력은 빈약하기에 일이 무대에서 드러나는 것만을 봅니다. 우리는 무대 이전에 준비되는 일들을 중요하게 보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서 쓰임을 받는 것도 큰 일이지만, 그 사람을 지금까지 잘 양육한 사람의 사역도 큰 사역입니다. 그 사람이 자라나도록 가정에서 그 자녀를 눈물로 양육한 어머니의 기도는 더 큰 사역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중에 어느 것이 더 크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일은 다 동일하며, 하나님 앞에서는 큰 일도 없고, 작은 일도 없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두드러지는 사람은 없을까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두드러지는 사람은 작은 것을 받았을 때, 받은 것을 받았다고 말씀드리며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편 50:23).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을 받게 된 것은 그가 작은 것을 받았을 때도 이미 받은 것을 받았다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받은 작은 혜택에 대해서 감사의 언어를 표하는 사람은 이미 미래의 큰 사역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지만 그 마음을 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듣기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공기만 빨아들이는데, 제게는 믿음을 주셔서 은혜를 빨아들이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오늘도 예배의 시간을 주셔서 하늘문을 열어주시고 제 마음문을 열어주셔서, 하늘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를 표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두드러진 영혼이 되며, 더 오래도록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관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감사는 수평적인 관계에도 큰 힘을 발휘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됩니다. 한 번은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수님, 미팅에 나가서 괜찮은 남자가 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물론 재수가 좋아야 하겠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의 문제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재수가 좋아야 하겠으며, 교회 용어를 쓰자면 은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에 저는 이렇게 대답을 이어갔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의 문제는 재수 또는 은혜의 문제이지만, 네 곁에 찾아온 좋은 사람이 네 곁에 계속 머물도록 만드는 것은 실력이란다.”
내게 찾아온 좋은 혜택이 한때의 방문이 아니라 지속적인 거주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인생의 실력입니다. 어쩌다 한 번 받는 축복이 첫 번째 축복이라면, 한 번 받은 축복을 계속해서 받는 축복이 두 번째 축복입니다. 한 번 받은 축복이 한때의 재수가 아니라 지속적인 축복이 되도록 만드는 것도 감사의 표현에 있습니다.
인간관계와 연애의 비결도 감사에 있습니다. 혹시 모임 가운데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감사의 전략을 사용하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을 만날 때, 너무 조급하게 다가가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먼저 급하게 다가가면 오히려 그르칠 확률이 더 높습니다. 사람은 상대방이 너무 급하게 가까이 다가오면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게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사랑의 마음을 그저 감추고 있어도 안 됩니다. 상대방이 그것을 알지 못할 테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고맙다”고 말을 건네 보십시오.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 가운데 좋은 점을 끄집어내서 “고맙다. 네가 이렇게 해주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다른 친구들도 너를 얼마나 칭찬하는지 모른다”라고 말해 보십시오. 이렇게 감사의 말을 건네면 그 사람이 당신을 사랑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집니다.

그럴까요? 사람은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당신보다 더 끌리는 사람이 있어서 저곳으로 갔더라도 결국 다 되돌아올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자리에서는 만남도 결국 일시적 방문에 그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과 오래 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로 되돌아가려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연애를 포함한 멋진 관계는 일상적 감사에서 출발하여 신앙적 찬양으로 승화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 타령만 하고 감사의 언어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관계는 일시적 방문으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 감사의 효력

감사를 표현할 때, 시련을 이기는 능력과 은사를 계발하는 혜택도 누릴 수 있습니다. 감사는 우리에게 삶의 시험을 준비하는 능력을 제공해 줍니다. 학교에서는 학기 말에 시험을 치릅니다. 시험이란 무엇일까요? 감사의 시각에서 볼 때, 시험은 감사를 표현하는 시간입니다. 시험은 학생이 한 학기 동안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받았다고 쓰고 나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재미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 학생은 답안지에 거의 한 줄도 쓰지 못했습니다. 낙제 점수를 주려고 했는데, 깨알 같은 글씨로 조그맣게 쓰인 글자들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한 문제도 못 풀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학기 동안 열심히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애교 점수라도 주어야 할까요? 제 마음에 애교 점수라도 주고 싶었으나, 다른 원리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원리란 무엇일까요? 추상적인 감사는 무효이며, 감사는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추상적인 감사는 효력이 없습니다. 별 내용 없이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무의미하게 발하는 경우에 오히려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또 뭘 거저 받으려고 인사치레만 하는구나.’
감사는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받은 것을 받았다고 말할 때 감사의 효력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대해서 쓰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고 합시다. 만약 이렇게 쓴다면 점수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했어요. 이만 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써야 할까요? 가르침을 받은 대로 써야 하겠지요.
“하나님의 섭리에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제 삶을 지켜주신 보존(保存)의 섭리가 있습니다. 제가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저를 떠났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제 곁에 머물러 주신 동행(同行)의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 정말 문제는 환경과 여건의 문제 이전에 판단력이 흐려지는 데 있는데, 그때 누구를 만나야 할지 어느 곳에서 새 힘을 얻어야 할지를 알려주시고 저를 수렁에서 이끌어주신 인도(引導)의 섭리가 있습니다. 저희 가정이 어려운 일을 겪을 때, 제가 적용을 했더니 좋은 결실들이 맺어졌습니다.” 이렇게 쓰고 나간다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받은 은혜와 혜택을 세어보아라

우리가 구체적으로 감사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내가 받은 은혜와 혜택을 헤아리는 시야를 회복해야 하겠지요. 우리는 많은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은혜와 혜택을 헤아리는 능력이 모자랍니다. 감사는 당연한 것이지만 아무나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받은 축복을 헤아리는 능력 있는 사람만이 감사합니다.
학교를 졸업하면 시험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지만, 졸업 이후에도 시련은 자주 찾아옵니다. 인생의 시련도 우리의 감사를 회복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적 배려일 것입니다. 시련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시련을 이기려 하기보다는 감사를 더하려고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감사의 마음을 회복시켜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풍성하게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시련 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은사도 구체적인 감사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감사를 더하면서 옮길 때, 그곳에서 나의 은사가 싹트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건네기를 원한다면, 다른 분의 좋은 이야기들을 선명하게 듣고 감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분의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 내가 받은 것을 받았다고 공책에 표현할 수 있다면, 이제 서서히 청중을 늘려가면 될 것입니다. 구체적인 감사가 더해질 때, 구체적인 은사가 펼쳐지게 됩니다.
그동안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았던 삶에 대해서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있는 이 자리를 떠나기 전에 내가 받은 은혜와 혜택에 대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바울처럼 “내게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내가 받은 것을 받았다고 고백하며 구체적으로 감사를 표할 때, 이전에 내 삶을 떠났던 행복과 능력이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글/장경철 교수
서울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이며, 저서로 『인생의 무의미를 논하기 전에』(예영), 『금방 까먹을 것은 읽지도 말라』(비전과리더십), 『사랑이 가장 아름답다』, 『신학으로의 초대』(이상 두란노) 등 수 편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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