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직분관의 변질과 교황제도의 발전- 이상규 교수
2017.01.23 17:46
직분관의 변질과 교황제도의 발전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신학과)
교황제도의 기원
교회의 모든 직분은 봉사의 직분이고, 그 직분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점에 있다. 예수님께서도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눅 22:26)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교훈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모범을 보이셨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2세기를 거쳐 가면서 인간적인 다스림, 곧 교회에서 계급 구조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교황제도로 발전했고, 이런 제도를 교권제도라고 말한다.
사도시대 교회에는 ‘집사’와 ‘장로’, 그리고 ‘감독’이라는 직분이 있었다. ‘장로’는 ‘감독’이란 말로도 불렸기 때문에(행 20:17,28; 딛 1:5,7; 빌 1:1) 개혁교회는 장로와 감독을 동의어로 본다. 따라서 신약 교회의 직분은 오직 ‘집사’와 ‘장로’뿐이었다. 이를 우리는 2직분론(二職分論)이라고 말한다. 후에 ‘장로’직은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 곧 목사와 장로로 분화가 된다(딤전 5:17). 따라서 목사도 장로직에 포함된다. 하나님은 교회의 항구적인 유익을 주기 위해 이런 직분을 주셨고, 이 직분 사이에는 상하의 구별이 없고 직임의 구별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점차 직분관의 변질이 나타났다. 장로는 감독이라고도 불렸는데, 감독이란 말은 살피는 자(overseer), 감독하는 자(supervisor, superintendent)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인지 점차 감독은 다른 장로와 구별되는 보다 상위의 계급으로 이해되었고, 교회에는 집사 장로 그리고 감독이 있다고 하는 3직분론(三職分論)이 대두되었다. 여기서부터 교회 직분이 계층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차츰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고 감독이 세워졌는데, 대도시의 감독들은 다른 지역의 감독보다 더 높은 지위와 권위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즉 로마,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에베소, 고린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들은 보다 높은 권위를 행사하며, 대감독(Patriarch)으로 불렸다. 이와 같은 교회 직분의 계급화 과정을 거쳐 590년에는 ‘교황’이라는 인간 중심의 교권 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집사나 장로 같은 직분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처럼 교황제도는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을 겪으면서 형성된 것이다.
교황제도의 역사적 발전 과정
그렇다면 교황제도는 어떤 역사적 발전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번에는 이 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교회가 설립된 후 1세기 말까지 교회는 사도들의 지도하에 있었다.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사도들의 제자들인 사도 교부들에 의해 교회가 인도되었다. 그런데 2세기 이후부터 직분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직분이 계급으로 이해되어 계층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개별 교회에는 여러 장로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장로들 위에 다스림의 위치에 있는 한 사람의 감독이 있다고 본 것이다. 감독직이 부상한 것이다.
당시의 교회적 상황이 이런 경향에 영향을 주었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나 안디옥의 익나치우스(Ignatius of Antioch)는 이단의 발호를 막고 외부로부터의 박해에 대처하기 위해 감독직의 권위를 높이는 데 일조하였다. 이와 같은 감독직의 강조는 감독의 권위를 부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3세기에는 이런 경향이 심화되었다. 이 시기 키프리안(Cyprian of Carthago, 195~258)은 “감독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하여 교회는 ‘믿는 자의 모임’이라기보다는 감독이 있는 교회에 소속된 모임으로 보게 된 것이다.
이런 키프리안의 감독 중심의 교회관에 기초하여 로마교회 감독들은 로마교회는 다른 지역 교회보다 우위의 권위를 지닌다는 소위 ‘로마교회 우위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로마는 세계의 수도로서 정치적, 지리적으로 당시 세계의 중심지라는 점, 로마교회는 타 지역보다 교인 수가 많고 경제력이 있고 영향력이 컸다는 점, 혹은 노스틱이나 몬타니즘과 같은 이단이나 이설에 적절하게 대처하여 권위를 유지했다는 점, 그리고 베드로나 바울 등과 같은 대 사도들의 활동지요 순교지였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베드로가 로마의 첫 감독이었다는 주장이 170년경부터 유포되기 시작했다. 또 키프리안이 로마교회의 우위성을 주장했고, 4세기 말 로마의 감독 다마수스 1세(Damasus I, 366~384)는 마태복음 16장 18절을 이용하여 자신의 감독직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사도적 전승’을 계승한 것임을 공포하였다. 그리고는 제롬(Jerome)에게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도록 지시하고(이 역본이 흔히 불가타 역으로 불리는 Vulgate 판이다),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로마감독의 권위를 이 번역에 반영토록 지시했다. 로마교회의 수위권은 그 후 시리치우스(Siricius, 384~399), 이노센티우스(Innocentius, 401~417)에 이어 거듭 주창되었고, 로마의 감독 레오 1세(Leo I, 440~461)는 마 16:18-19, 요 21:15-17, 눅 22:31-32에 근거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전권대사요, 로마의 감독은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로마교회 감독은 타 지역 감독보다 높은 권위를 지닌 것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96년경에 쓰여진 로마의 클레멘트 서신을 보면 이런 경향이 1세기 말부터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로마에서 1,400km 떨어진 고린도교회에 내분이 일어 문제가 생겼을 때 로마의 클레멘트는 편지를 보내 이 교회 문제에 개입했다. 이 점은 이미 로마교회가 타 지역 교회보다 우위의 권위를 행사한 흔적으로 보인다.
감독에서 교황으로
로마의 감독이 타 지역 교회 감독보다 우위의 권위를 지니게 되자 325년 지금 터키의 니케아에서 모인 회의에서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의 세 감독을 동일시하여 다른 지역 감독들보다 높은 대감독(Patriarchs, ‘총대주교’라고도 불림)이라는 칭호를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로마만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감독에게도 대감독의 칭호를 부여한 것은 점차 부상하던 로마교회의 우위성을 암암리에 부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래서 로마교회 감독은 이 결정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381년에 모인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콘스탄티노플 감독에게도 대감독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콘스탄틴 황제가 수도를 로마에서부터 비잔틴으로 옮겨 이곳을 ‘새 로마’라 하여 콘스탄티노플, 곧 콘스탄틴의 도시라고 명명했는데, 차츰 이곳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대감독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451년의 칼세돈 회의에서는 예루살렘 감독에게도 대감독의 칭호를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5세기 중엽 이후에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지역 감독이 ‘대감독’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도 로마 감독의 수위권은 인정을 받아왔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이유 외에도 예컨대, 451년 훈(Hun)족과 반달(Vandal)족의 침입으로 로마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발렌티누스(Valentinus, 425-455) 황제의 군대는 속수무책이었고, 이들을 제어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로마의 감독 레오 I세(Leo I)에 의해서 아틸라(Attlia, 452)와 가이스릭(Geisric, 455)를 외교적 수완으로 제어하여 로마를 전화(戰禍)에서 구출하였고, 또 이들 이민족의 교화에 힘쓰는 등, 선교활동, 그리고 프랑크족의 클로비스(Clovis)로 하여금 496년 개종하게 하는 등의 일로 로마 감독의 권위가 크게 부상하였다. 말하자면 476년 서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교회가 국가권위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의 감독은 590년에는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아 ‘교황’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가 바로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590~604)였다. 그가 ‘교황’(Pope)으로 불린 첫 인물이다. 교황을 뜻하는 영어의 Pope는 이탈리아어 papa에서 왔는데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처럼 교황제도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오도된 교리로서 역사적 발전과정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순수한 ‘말씀의 봉사자’가 ‘사제’(司祭)가 되어 성례전 수여 등과 같은 소위 은혜의 수여자가 된 것이다. 이 사제는 사도적 계승이라는 명분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교권주의가 계급주의(Hierarchism) 곧 교황주의(Papism)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개혁주의 역사신학자 윌리엄 커닝햄(William Cunningham)은 그의 『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 제1권 7장에서 첫 2세기 동안의 기독교회사를 취급하면서 교회의 부패 혹은 변질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는 교회의 부패 징후를 3가지로 정리했다. 그 첫째가 고위성직 계급(Prelacy)의 출현이었다. 둘째는 은혜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견해의 대두, 셋째는 덕(Virtue)과 성만찬의 효과에 대한 과장된 개념의 대두가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2세기부터 서서히 나타난 직분에 대한 곡해는 교회를 인간 중심의 계급 구조로 변질시켰고, 성경적 근거가 없는 교황제도로 나타난 것이다.
교황제도: 변질된 교회관의 결과
그렇다면 로마 가톨릭은 교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는 다른 사도들보다 높은 지위를 부여하여 그에게만 천국의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권위가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로마 최초의 감독(Bishop)이었으며, 그 이후의 감독들은 그의 계승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로마의 지리적, 역사적 위치는 로마 감독의 수위권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고 한다. 로마 가톨릭의 한 고대 요리 문답(old Catechism of the Dutch Bishops) 152문의 “교황은 무엇이뇨?”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다. “교황은 로마의 감독이며, 베드로의 합법적 계승자이며,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교황은 지상에서의 절대적인 최고 통치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곳에서도 베드로가 다른 사도보다 우위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지 않다. 도리어 그 반대의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Tu es Petrus et su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마 16:18)라고 할 때 이 ‘반석’(τη πετρα)은 ‘바위’인데(사 28:16; 고전 3:1; 벧전 2:4,6,7),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주장처럼) 베드로의 인격이 아니고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할 뿐이다. 베드로는 결코 로마의 감독이 아니었다.
갈라디아 2장 9절에서 예루살렘의 기둥을 말할 때 먼저 야고보가 나오고, 그다음이 게바, 그다음이 요한 순서로 되어 있다. 갈라디아 2장 11절에서는 베드로가 바울에 의해 면책(面責) 당하고 있는데, 이 점은 베드로의 우위의 권위를 부인하는 증거이다. 베드로전서 5장 1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을 ‘함께 장로 된 자’라고 하여 자신의 우위성을 말하지 않고 있다. 요한계시록 21장 14절에는 예루살렘 초석에 베드로만 언급된 것이 아니고, 12사도의 이름이 있다.
이상을 통해서 살펴볼 때 베드로는 결코 로마의 감독이 아니었고 독특한 권위를 지녔다고 볼 수 없다. 결국 교황제도는 2세기부터 나타난 변질된 교회관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590년 9월 3일 자로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1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서 종’(Servus Servorum Dei)이라고 하면서 겸손히 이 일을 맡았으나 후일 교황제도를 확립하고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 이교주의로 빠지게 한 인물이 되었다.
그렇다면 추기경(Cardinal)이란 무엇인가? 추기경 제도를 발전시킨 교황은 레오 9세(Leo, IX, 1049~1054)였다. 원래는 로마 교황청 교회 사제를 추기경(樞機卿, Sacrae Romanae Ecclesia Cardinalis, The Cardinal of the Holy Roman Church)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후에는 유럽 전역에서 추기경을 선출하여 기독교 세계를 대표하도록 했다. Cardinal은 ‘중요한’이란 의미의 카르도(cardo)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돌쩌귀’(hinge)라는 의미가 있다. 곧 교회의 중요한 인물인 중추(中樞)라는 뜻이 있다. 추기(樞機)란 말은 중추가 되는 기관을 의미하고, 경(卿)은 높은 벼슬에 대한 경칭이다. Cardinalis란 용어는 그레고리우스 1세(590~604) 때 교회법 용어로 채택되었다. 11세기에 와서 유럽 전역에서 Cardinal을 선출하게 되었다. 1586년에는 Cardinal의 수를 70명 이내로 하여야 한다고 결정했었으나, 1958년 요한 23세 때 이 규칙은 무시되었다. 그래서 지금 추기경의 수는 130명가량 된다. 이 역시 변질된 교회관의 산물이었다.
글/이상규 교수
미국 Calvin College와 Associated Mennonite Biblical Seminary 방문교수, 호주 Macquarie University 초기기독교연구소 연구교수, 고신대학교 부총장을 역임. 현재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