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큰 핍박, 큰 울음, 큰 기쁨 - 송태근 목사(삼일교회)
2019.11.06 14:26
큰 핍박, 큰 울음, 큰 기쁨
송태근 목사(삼일교회)
인생의 항해는 종종 고난이라는 풍랑으로 흔들립니다. 짙은 밤 세차게 부는 비바람을 맞으며, 외로운 배는 끝 모를 바다 한가운데에 위태롭게 행로를 이어갑니다. 그 누가 이 거센 풍랑 앞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온전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에 풍랑이 찾아올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가 깨지고 근심과 두려움 혹은 분노와 회한에 사로잡혀 인생을 허비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문제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평화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성경의 한 사건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다.
인생의 풍랑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초대교회의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가 사울의 회심입니다. 이 회심 사건 직전에 사울은 스데반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주동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고 사람들이 다 흩어지게 되었습니다(행 8:1). 이때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였다고 전해집니다. F.F.Bruce는 ‘잔멸하다’를 산 멧돼지가 포도밭에 들어가 이제 막 영글기 시작한 신선한 포도알을 거친 입과 발로 짓이긴 것으로 설명합니다. 마치 피가 낭자한 것처럼 포도 빛깔이 번져서 핏빛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박해는 이렇게 끔찍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핍박의 서곡을 알리는 하나의 단초에 불과했습니다. 사울이 이 박해의 주동자였습니다. 그런데 핍박자 사울은 장차 사도 바울이 되어 유럽선교의 선봉자로서 끝내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 당하였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던 청년 사울 본인이 자신에게 일어날 변화를 알았겠습니까? 설마 자기가 죽인 그 사람이 전한 복음을 이어 전하게 될 줄을 알았겠습니까? 스데반도 자기를 돌로 쳐 죽인 저 청년이 내가 전한 복음을 이어 전할 자가 될 것을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역사와 인생을 경영하는 수단은 굉장히 신비롭고 오묘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모든 것이 다 해석이 되고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을 되돌아보니 그 핍박이, 그 고통이, 그 문제의 소용돌이가 하나님의 섭리이며 경륜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지나고 나서야 돌아보면 한 발자국도 하나님이 손대지 않은 영역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의 터널을 지날 때에도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은 오늘의 상황으로만 인생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일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입니다. 풍랑 한가운데에서도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풍랑을 자신의 뜻에 따라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사용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먼 훗날 인생의 풍랑을 멋지게 반전시킨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사랑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색깔과 정체성을 분명케 하는 울음
큰 핍박으로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자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고 기록합니다(행 8:2). 울었는데 크게 울었습니다. 앞서 큰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핍박의 결과 스데반은 죽임당하고, 스데반을 장사한 경건한 사람들이 크게 울었습니다. 성경이 무엇 때문에 이런 감정적인 표현을 기록해 놓았을까요? 이 묘사가 없어도 문맥상 메시지 전달이 안 되는 것이 아닌데, 왜 성경기자는 울었다는 표현을 굳이 기록하였을까요? 이런 기록을 구체적으로 남길 때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장례식의 울음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유대인 부자들은 호곡꾼을 사서 장례식을 돕게 합니다. 함께 울어주는 거죠. 이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장례식의 울음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신성모독죄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장례를 치르고 크게 울었다는 것은 당시 문화 속에서는 공범자로 몰릴 수 있는 큰 위험이 있었습니다. 같은 부류로 취급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울었던 것입니다. 경건한 자들이 스데반의 죽음 앞에서 그의 죽음과 그가 전한 복음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크게 울었습니다. 이것은 생의 위기 앞에 당당히 맞서는 결단이 포함된 울음입니다. ‘당신이 전하다 숨진 그 복음을 우리가 대신 전하겠습니다!’ 사실상 이 선언을 하는 거죠. 살기등등한 검거의 열풍이 불고 있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경건한 유대인들이 스데반의 장례를 정점으로 자기의 신앙을 드러내는 겁니다. 핍박과 울음이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더욱 그 색깔답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울면 졌다고 생각하죠? 비명을 지르면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아직 포기할 수 없었기에 우는 겁니다.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가슴에 늘 큰 울음을 담고 살아갑니다. 여기에서 끝낼 수 없다! 울음 뒤에 평화가 찾아온다는 운명적 결단을 하는 겁니다. 스데반의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울었습니다. 이 울음은 복음을 위해 다시 헌신하겠다는 울음입니다.
성도는 모두 이런 위기를 직면합니다. 비명을 지르고, 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울음은 비탄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신앙의 색깔과 정체성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드러내게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울음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시 확인하고 순종과 희생을 결단하는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놀라운 반전
큰 핍박과 큰 울음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8).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역사적 맥락을 안고 있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과 연관된 간략한 역사의 스케치를 하겠습니다. B.C. 6세기경 앗수르 제국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점령은 당했는데, 까탈스럽고 저항이 강해 호락호락 손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앗수르 제국이 이스라엘의 정신적 동력을 파헤쳐보니 그 밑바닥에 여호와 종교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정신적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이 종교를 말살시키려는 정책으로서 인종 간 결혼으로 피를 섞도록 사회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앗수르 민족과 결혼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사회적 이익을 주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회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으로 이스라엘 안에 두 극단의 부류가 생성되었습니다. 한 부류는 타협하며 앗수르와 피를 섞고 여호와 종교를 포기하여 신앙을 변절시키고, 그 사회시스템에 적응하여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신앙을 지키며 엄청난 불이익과 손해를 감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중 잘 먹고 잘살기 위하여 신앙을 버리고 혼혈민족이 된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피가 섞여진 유대인으로서, 정통 유대인들에게 개, 돼지 취급받았습니다. 그들의 후손들까지도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정통 유대인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사마리아 땅은 600년 넘는 긴 역사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한숨이 배어 있는 아픔의 땅이며 억눌린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지역이 하필이면 유대 땅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핍박과 박해로 흩어진 성도들이 처음 도착한 곳이 바로 이 사마리아 성이었습니다(행 8:5). 수백 년 역사 속에서 슬픈 운명을 안은 채 빛을 보지 못하며 멸시당하던 민족의 땅에 복음을 손에 든 사람들이 도착한 겁니다. 그래서 그 땅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수백 년의 어둠의 사슬을 끊어내고 역사의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힌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무명의 사람들이 전한 그 복음 때문에 기쁨이 임했습니다. 큰 핍박과 큰 울음 뒤에 큰 기쁨이 가장 치욕스럽고 어두운 땅에 임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셔서 준비하신 놀라운 반전의 은혜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결론인 큰 기쁨을 기대하라
성도는 이미 그 정체성에서 복음 때문에 고난과 눈물과 애통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엄중한 소명 앞에 서 있습니다. 죄의 바다 한가운데 이어지는 문제의 소용돌이가 인생이라는 돛단배를 향방을 알 수 없이 밀어내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비바람 속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후로는 굴곡진 인생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동생들과 함께 길게는 보름 넘게 행상엘 나갔다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고픈 배를 움켜잡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새 파는 가게 점원이며, 인쇄소 직공 등으로 살아내면서 고등학교를 두 번씩이나 휴학한 후에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교복 입고 등교하는 동년배들을 보면서 일터로 터벅터벅 발을 옮겨야 했던 제가 느꼈던 박탈감이란 지금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얼마나 큰 절망이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저 멀리에서부터 울리는 은은한 소리에 이끌려 찾았던 한 교회에서 저는 절망의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제가 겪던 문제에 대한 정답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분명히 알게 해 주셨습니다. 큰 고난 후 찾아온 큰 평화였습니다.
문제를 대하는 성도의 자세는 선하신 하나님의 결론인 큰 기쁨을 기대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문제 앞에서 ‘이익을 택할 것이냐, 의미를 택할 것이냐’라는 기로 앞에 서서 결단을 통해 매일 싸워야 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셔서 종국에 우리의 삶 속에서 큰 기쁨을 확인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글/송태근 목사
삼일교회 담임목사이며 총신대와 총신대 신대원 강사를 맡고 있다. 강남교회 담임목사(1994~2012), 교갱협 상임회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전환의 신앙』(생명의 말씀사), 『후회 없는 인생을 살라』(국제제자훈련원), 『믿음은 그런 것이다』(포이에마), 『하나님이 다 하신다』(성서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