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중세 후기 교황권의 문제 -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신학과)
2020.04.29 13:23
중세 후기 교황권의 문제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신학과)
중세 후기, 곧 13세기로 접어들자 구라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사회적인 변화와 더불어 교회 부패가 가중되었고, 민족주의(Nationalism)가 대두되면서 유럽을 지배하던 교황권이 도전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4, 15세기에는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 대역병, 도덕적 부패,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침략, 특히 변화된 정치적·경제적 상황이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거대한 중세 사회를 몰락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1. 이노센티우스 3세
그레고리우스 1세는 590년 교황이 되었는데, 그가 ‘교황’으로 불린 첫 인물이었다. 그때부터 점차 교황권은 신장(伸張)되었는데, 1073년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1073~1085) 때부터 교황권은 절대적 권위를 지니게 된다. 그 후 이노센티우스 3세(Innocentius Ⅲ, 1198~1216), 그리고 보니파시오 8세(Bonifatius VIII, 1294~1303) 등이 교회와 국가, 곧 성,속 양 영역을 지배했던 대표적인 교황이었다. 특히 이노센티우스 3세가 교황으로 재직했던 기간은 교황제의 가장 찬란한 역사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막강한 권력의 중심이었고 교회는 물론 세속 정치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재임 당시 제국이 분열 상태에 있었다는 이유도 있으나 이노센티우스는 세속 권력에 대한 야망이 있었고 능력 또한 특출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 귀족집안 출신으로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볼로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교회법 전문가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삼촌이었던 교황 클레멘스(Clement) 3세에 의해 30세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37세 때인 1198년 1월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처음 군중 앞에서 자신은 “하나님의 종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살겠노라”고 선언하였고, “마태복음 24장의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생활을 모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지상에서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의 통치권은 세계를 포함하며,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섰을 때 하나님보다는 아래이지만 모든 인간보다는 높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자신은 지상의 어떤 법정에도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런 배경에서 ‘전권’(全權, Plenitudo Potestatis)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이것은 교황의 군주권을 의미하며, 황제권의 모방(Imitatio Imperii)이라고 할 수 있다. 교황의 절대적 통치권을 표현하는 이 용어는 13세기 교회 문서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데, 이 용어는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와 함께 교황의 우월권을 강조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인노센트 3세는 자신의 위치를 ‘첫째이자 수위의 통치자이며 교회의 수장’(primus et summus magister et princeps ecclesiae)이라고 했고, 그 근거로 마 16:18, 요 1:42, 20;23, 고전 4:4을 들었다.
교황이 된 이노센티우스 3세는 성지(聖地)의 회복과 교회의 개혁을 두 가지 과제로 인식했다. 이 두 가지는 영적 목표였으나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세속 권력이 필요하다고 보아 세속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였고, 세속 권력에 대한 영적 권위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구약의 신정 체제를 이론적 근거로 제시하면서, “교회는 태양이며 세상은 달과 같다. 제왕들은 자기 왕국만 통치하지만 베드로는 세상 전체를 다스리신다. 영적 권위는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주어졌지만 왕권은 인간들의 음모에 의해 주어져 있다”고 말하고 “주 예수그리스도는 대리인을 통해서 만물을 다스리시며 하늘과 땅과 지옥의 만물들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하므로 그 대리인에게도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마치 영혼이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인 만큼 신부들은 왕들보다 더 귀중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시대는 교황권이 절정에 달했던 시대였다.
그의 재임 중 세속 통치자에 대항하여 절대권을 행사했던 두 가지 사례가 있는데, 이것을 보면 그의 권세가 얼마나 컸던 가를 짐작할 수 있다. 첫 번째 경우가 프랑스 왕 필립(Philip) 2세에 대한 조치였다. 필립 2세가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를 취했을 때, 이노센티우스 교황은 이를 승인하지 않고 본처를 받아드리도록 압력을 넣었다. 처음에는 불복하였으나 교황으로부터 수찬정지령을 받고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한 나라 왕의 가정사까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영국 왕에 대한 조치였는데,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의 임명 문제와 관련하여 영국왕 존(John, 1167~1216, 재임기 1199~1216)과 대립한 일이 있다. 1205년 캔터베리 대주교 허버트 월터(Herbert Walter)가 서거하였을 때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수도회의 부원장을 대주교로 임명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영국의 존 왕은 놀위치(Norwich)의 주교 존 드 그레이(John de Gray)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이 문제로 영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왕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때 교황은 이 모두를 무시하고 랜톤(Stephen Lanton) 추기경을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존 왕은 불복하였다. 화가 난 교황은 존 왕에게 수찬정지령을 내렸고, 1209년에는 그를 파문하였다. 존 왕은 이에 불복하고 영국내의 교회 토지를 압류하였다. 그러나 교황 이노센티우스 3세는 1212년 영국 왕 존의 폐위를 선언하고, 그의 영토를 몰수하고 프랑스왕 필립에게 영국을 침입하도록 종용하였다. 이렇게 되자 존 왕은 교황에게 굴복하고 사죄를 간청하였다. 이에 교황은 1213년 복권하여 주고 영토를 되돌려 주었다. 그 대신 매년 교황에게 공물을 바쳐야 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영국의 존 왕을 ‘실지왕(失地王) 존’이라고 부른다.
교황과의 싸움에서 패한 그는 권위를 잃었고, 1215년 6월 15일에는 40명의 귀족 앞에서 자신의 왕권을 제한하는 문서인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63개 조항, 3천 단어로 구성된 마그나 카르타, 곧 ‘대헌장’은 국민의 자유를 명시한 근대법의 기초로서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문서로 알려져 있다. 이 문서에는 ‘자유인이라면 누구도 법령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체포, 혹은 투옥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추방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영국의 역사가이자 정치인으로 액턴 경(Lord Acton)으로 불린 존 달버그 액턴(John Dalberg-Acton, 1834~1902)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말했는데, 이노센티우스 3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권력 음모, 부정, 축첩, 이교숭배 등 여러 가지 추문을 남기기도 했는데 실제로 극도로 타락한 종교 권력이었다. 로마 가톨릭은 그가 제4차 십자군원정(1202~1204)을 주도하고, 이단이라고 간주된 알비조파(Albigense)를 박멸하고, 제4차 라테란 공의회(the Council of Lateran, 1215)를 소집하여 교회의 대사를 치렀다는 점에서 큰 업적으로 간주하지만 절대권력은 교황권의 쇠퇴를 촉진했다. 제4차 라테란회의는 412명의 주교, 70명의 대감독과 800명의 수도원장이 참석한 회의인데, 이 회의에서 로마 가톨릭의 교권체제를 반대하고 싸웠거나 복음적인 활동을 했던 알비조파, 카다리파, 그리고 발도파를 이단으로 보아 십자군칙령을 발표하여 살육을 감행하였고, 비밀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반 가톨릭적 인물을 처단하였는데, 두 사람의 증인만 있어도 이단으로 정죄하고 고문하는 공포의 재판소를 설치하였다. 또 고해성사를 연 1회 의무화하였고, 화체설(化體說)을 공인하였다. 말하자면 교황은 자신의 절대 권력을 통해 복음적인 신앙 집단을 탄압하고 오도된 교리를 확정했던 인물이었다.
2. 보니파시오 8세
보니파시오 8세(Bonifatius VIII, 1294~1303)는 그레고리우스 7세, 이노센티우스 3세와 동일한 통치 이념을 가졌던 교황이었으나 그의 시대에 교황권은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피에트로 델 모로네라는 본명으로 수도사로 살던 첼레스티노 5세가 1294년 교황으로 피선되었으나 5개월 후 교황직에서 물러났고, 그 후임으로 추기경 출신인 보니파시오 8세가 교황에 선임되었다. 보니파시오 8세는 이탈리아 로마 근처 아냐니 출신으로 전임 교황의 퇴임을 강요하였고, 자신이 교황이 된 후에는 전임 교황을 감금하여 격리된 채 죽게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프랑스 왕 필립 4세(Philippe IV, 1268~1314)와 대결했다. 필립 4세는 필립 3세의 아들로 는데, 1285년부터 1314년까지 프랑스 왕이었는데, 잘생긴 외모로 미남 왕(le Bel)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영국과의 전쟁(1294~1303)을 치르기 위한 군비조달을 목적으로 자국 내의 성직자들에게도 과세하자 성직자들이 1296년 교황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프랑스와 싸워야 했던 영국왕 에드워드 1세(Edwards I, 1237~1307)도 자국의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이때 보니파시오 8세는 ‘교직과 평신도’(Clericis Lacios, 1296)라는 교서를 내려 교황 허가 없이 성직자와 성직 소유에 대해 과세하거나 납세하는 자에 대해서는 파문한다고 선언하였다. 이 같은 교황의 조치에 대해 영국왕 에드워드 1세는 세금을 내지 않는 성직자의 법적 보호 박탈을 선언하였고, 불란서 왕 필립 4세는 프랑스에서의 금, 은, 화폐의 해외 반출 금지령을 내려 교황과 대결하였다. 필립 4세는 옛 로마법, 곧 콘스탄티누스의 신교 자유 후 국가가 징세를 주관했던 법에 근거하여 이와 같은 조치를 취했다. 실제로 필립 4세는 “왕은 왕국의 주인이다”(rex imperator in regno suo)는 말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했던 강력인 군주였다.
강력한 천주교 국가였던 프랑스에서의 자금 유입이 끊기게 되자 교황청은 경제적인 손실을 입게 되었고, 사치했던 보니파시오 8세는 재정적 위기에 직면하여 프랑스왕과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교황관에는 48개의 루비, 72개의 사파이어, 45개의 에머랄드, 66개의 진주가 박혀 있었다고 하는데 이 점은 그가 얼마 사치하고 화려한 부를 즐겼는가를 암시해 준다. 결국 교황은 1297년 성직자들의 자유헌금을 허락하고 위급할 경우 왕이 과세할 수 있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교황은 필립 4세의 할아버지로서 십자군 전쟁에서 사망한 루이 9세를 성인으로 시성(諡聖)했다. 프랑스 왕과의 타협적인 조치였다. 이런 타협은 그 이전 시대의 상황에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니파시오 8세는 1301년 프랑스의 필립 4세와 다시 대결하게 되었다. 필립 4세가 교황사절(Pamiers 감독 Bernald Saisset)을 반역죄로 체포한 일이 발단이었다. 교황은 석방을 명하고 프랑스왕을 로마로 소환하였다. 필립 4세는 응하지 않았다. 도리어 국회를 열어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교황에게 불복하였다. 이렇게 되자 교황은 1302년 유명한 교서 ‘하나의 거룩한 교회’(Unam Sanctam)을 발표하고 세속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교황은 이 교서에서 이 세상에는 단지 하나의 보편교회가 있음을 주장하면서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은 구원의 필수 조건임”을 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에 반항하는 자는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세속 권위는 영적 권위에 예속되어 있다는 점을 말할 것이 이 교서의 핵심인데,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우리는 복음의 말씀으로부터 교회와 교회의 권력에는 두 가지 검, 곧 영적인 영역을 다스리는 검과 세속을 다스리는 검이 있다는 점을 배운다. 사도들이 ‘보소서 여기(이 말을 한 사람이 사도들이므로 이 뜻은 교회가 된다) 검 둘이 있나이다’라고 했을 때 주님은 ‘너무 많다’고 하시지 않고, ‘족하다’라고 대답하셨다. 따라서 세속의 검이 베드로의 권력 안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다. 영적인 영역을 다스리는 검과 세속을 다스리는 검은 둘 다 교회의 권력 안에 있다. 그러나 후자는 교회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또한 전자는 교회에 의해 사용되어야 한다. 전자는 신부에 의해, 그리고 후자는 왕과 위정자에 의해 사용되어야 하지만 신부의 뜻과 허락에 따라야 한다. 따라서 한 검은 다른 검 아래에, 즉 세속 권위는 영적 권위에 예속되어 있다. 바울이,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한 바라’고 했으므로 만일 한 검이 다른 검에 예속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아니다.”
이 교서는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끝맺고 있다. “우리가 이제 밝히 말하고 표명하고 선언하노라. 모든 인간 피조물이 구언을 얻으려면 로마 교황에 대한 복종이 절대적으로 불가결하다”(Porro subesse Romano Pontifici omni humanae creaturae declaramus, dicimus, diffinimus omnino esse de necessitate salutis). 이런 교서에도 불구하고 필립 4세는 이에 불복하고 교황의 교서를 불사르고, 교황은 이단이며 도덕적으로 패역한 자라고 선언했다. 또 교황을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303년 교황을 체포하고 투옥시켰으나, 3일 후에 이태리 군에 의해 석방되었지만 이때의 충격으로 보니파시오 8세는 사망했다. 절대권력을 구가하던 교황권의 퇴락을 상징해 준다.
13세기말 서서히 일기 시작한 민족주의의 대두는 로마의 세계 지배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있는 교황의 지배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이 교황청에 대한 저항의식은 민족주의가 가져온 결실이었다. 교황의 절대권은 더 이상 인정받지 못했다. 보니파시오의 패배는 교황의 지배권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교황권의 몰락을 보여 주는 전조가 되었다. 보니파시오가 사망한지 11일 후에 도미니크 수도원장 니콜로 보카시니를 교황으로 선출했는데, 그가 베네딕트 11세였다. 베네딕트 11세(1303~4)때부터는 교황권이 더욱 약화되고 불란서왕의 영향 하에 있게 되었다. 베네딕트 11세는 8개월간 재위하고 독이 묻은 무화과를 먹고 피살되었다. 베네딕트 11세가 독살 당한 후 11개월 동안 교황을 선임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프랑스 태생으로 보르도(Bordeaux)의 대주교였던 베르트랑 드 고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그가 클레멘트 5세(1305~1314)였다. 프랑스인인 클레멘트 5세는 보니파시오 8세를 능가하는 ‘악랄한 성직 매매자’로 알려져 있다. 클레멘트 5세는 로마로 가지 않고 프랑스를 순회하며 교황직을 수행하다가 1309년 교황청을 아비뇽(Avignon)으로 옮겨 갔고, 1377년까지 약 70년간 지내게 되었다. 이 기간을 교황청의 바벨론 감금이라고 말한다.
글/이상규 교수
미국 Calvin College와 Associated Mennonite Biblical Seminary 방문교수, 호주 Macquarie University 초기기독교연구소 연구교수, 고신대학교 부총장을 역임. 현재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