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하라 - 박종순 목사(충신교회 원로)
2020.10.29 16:02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하라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가라지 틈새에서도 의연하게 자라는 알곡이 진짜 알곡이다
알곡과 가라지 이야기는 마태복음 13장의 기사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어떤 날 주인이 밭에 씨를 뿌렸다. 싹이 나고 자랄 즈음 밭에 나갔던 종들이 알곡과 함께 자라고 있는 가라지를 발견했다. 뿌리거나 심지 않은 가라지가 공생하고 있었다. 그 이후 사건의 전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마 13:25).
가라지를 뿌린 것은 원수였고 일꾼들이 잠자지 않았다면 가라지를 뿌리지 못했을 것이다. 가라지 사건의 책임은 양자에게 있다. 그것은 잠자는 사람과 가라지를 뿌리기 위해 때를 노린 원수다. 여기서 말하는 잠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과 교회를지켜야 될 사람이고, 원수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탄이다.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는 것은 교회라는 텃밭을 망가트리기 위해서이고, 가라지가무성한 원인은 지키지 못하고 방치한 일꾼들 때문이다.
왜 가라지가 활개 치는가? 외세의 공격이기도 하지만 교회가 방어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며, 의미 없는 일에 거룩한 힘을 소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라지의 공격은 시도 때도 없다. 독성물질처럼 침투력이 강하다. 사사로운 의견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견해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가라지라는 것은 성급하다. 가라지는 원수 사탄의 산물이다. 너는 가라지, 나는 알곡이라는 바리새적 판단이나 교만도 옳지 않다.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에 대한 답을 살필 필요가 있다. “가만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9~30).
알곡과 가라지 분별은 쉽지 않다. 그리고 서두르면 안 된다. 흑백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당장 가라지를 골라내고 불사르고 싶겠지만, 그리고 누구누구는 이래서 저래서 가라지라고 골라내고 싶겠지만, 그러다 보면 그 등쌀에 알곡도 꺾이고 뽑히게 된다.
알곡과 가라지는 근원이 다르다. 알곡은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가라지는 한해살이풀로 효용성이 없다. 그리고 알곡 성장을 방해한다. 추수 때까지 가만두라는 것은 거추장스럽고 꼴 보기 싫고 가치 없는 아무개라도 뽑아내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라지는 내실이 없고 쓸모가 없다. 그러나 뽑아 내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고 후유증이 남는다. 그래서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신 것이다.
주목할 부분은 추수 때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때라는 점이다. 추수 때가 있다는 것은 심판의 예고이며 경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추수꾼들에게”라는 것은 명령권과 실행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함께 자라게 두라”(30절). 알곡은 긍정적으로, 가라지는 부정적으로 함께 자란다. 가라지는 번식률도 강하고 뻗고 자라는 속도가 빠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두라”는 것이 밭주인의 깊은 뜻이다. “함께 자라게 두라”는 말의 의미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결연한 주인 의지가 드러난다. 주인 의도는 “추수 때”에 있다. 추수 때란 심판의 때를 뜻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건 현장에서 국지적으로 시행되곤 했다. 물론 노아 홍수 같은 전면적 심판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심판은 일회적이었고 앞으로 한 번 더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종말 심판이다. 추수 때란 하나님이 정하신 최종 심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심판은 계획도, 진행도 하나님의 의지대로 이뤄진다. 일꾼들이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선후는 가라지를 먼저 불사르는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동일한 밭에서 함께 자란다. 가라지 틈새에서 의연하게 자라는 알곡, 그게 진짜 알곡이다. “가라지 때문에 못 살겠다. 가라지 등쌀에 되는 일이 없다. 가라지 때문에 여럿이 망가지고 있다”라는 투정은 덜 익은 알곡이 하는 소리다. 신앙은 태평성세에서 자라지 않고 환난의 풀무에서
자란다. 교회의 성숙은 시험과 핍박을 견디면서 이뤄진다.
알곡을 만드는 데 가라지도 제 몫이 있음을 생각하라
가라지는 다루기 힘들고 어려운 존재다. 교회 안에 가라지는 있는가? 누가 가라지인가? 속단은 금물이지만 대충 이런 류의 사람들은 다루기 힘들고 피곤한 사람들이다. 알곡은 자리를 지키고 가라지는 흔들거린다. 바람에 쉽게 나부끼고 흔들거린다. 속이 비었기 때문이다. 빈 깡통이 시끄러운 것처럼 그네들은 말이 많고 시끄럽다. “은혜를 받았다. 목사님이 좋다”라며 다가서지만 마음은 딴 데 있다. 칭찬도 도를 넘으면 색깔이 변한다. 수다를 떨고 주변을 서성거리지만 의도는 다른 데 있다. 거기까진 소극적이다. 적극적인 부류는 사사건건 그럴싸한 명분을 세우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성경 구절을 들먹이고 법을 내세운다. 그러나 자신이 비성경적이고 탈법의 사람임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그네들은 비교의 명수들이다. 다른 교회와 비교하고 다른 목사와 비교한다.
교회나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진행형이고 미래완료형이다. 알곡도 되어가고 가라지도 되어간다. 추수 때라야 알곡과 가라지가 판가름 난다. 그네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한다. 가라지과에 속한 사람들은 야합력이 강하다. 만나고 모여서 일을 꾸미고 만드는 명수들이다. 그래서 가라지를 뽑아야 하는가? 어떻게 뽑아야 하는가? 그 비법은 뭔가!
성경대로 하는 게 비법이다. “추수 때까지 가만두라” 그러기엔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다. 양을 기르는데 염소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곳간에 거두어들이는 알곡을 만드는 데 가라지도 제 몫이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가라지 뽑는 데 거룩한 힘을 쏟으면 영력이 떨어지고 교회는 재판소가 되고 만다. 한국 교회는 가라지 논쟁으로 뜨겁다. 나는 알곡, 너는 가라지. 이 싸움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가라지도 잘 키우면 불쏘시개가 될 수 있다는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현대판 가라지를 분별하는 지혜
그러나 가라지를 방치하면 알곡밭을 망가뜨리고 폐농을 만든다는 데 문제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최후 심판, 알곡은 곳간에 가라지는 불 속에 던지는 것은 주인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 밭일을 책임진 일꾼들은 교회를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지 못하도록 막는 일, 알곡을 지키는 일, 가꾸는 일은 일꾼들 몫이다.
요즘 가라지는 개량종이어서 전략과 접근법이 교묘하다. 식별도 어렵고 대처도 쉽지 않다. 그러나 가라지 만의 보편적 특징이 있다.
첫째, 뿌린 이가 다르다. 알곡은 밭주인이 뿌렸고, 가라지는 원수가 뿌렸다. 알곡은 하나님이 기르시는 백성(교회)이고, 가라지는 사탄의 도구이며 하수인이다. 출처가 다르다.
둘째, 공존한다. 알곡밭 따로, 가라지밭 따로가 아니다. 동일한 밭에서 햇빛 받고 이슬 머금고 함께 자란다. 가라지 집단이 따로 있기도 하지만 거긴 훈련소일 뿐 공격 목표는 교회이다. 교회가 그네들의 일터이고 전장이다.
셋째, 자랄수록 알곡을 해친다. 씨앗일 때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자라면서 알곡 성장을 방해하고 알곡밭을 초토화한다. 이단 사이비 집단의 생산지는 다른 데 있고 교회에 침투한 가라지 집단은 교회 안에서 거점을 확보하고 세를 키워 나간다.
넷째, 그러나 그네들은 망하거나 사라진다. 세계 교회 역사에서 백 년이나 이백 년 명을 유지한 이단은 없다. 한 시대를 거치다가 사라지거나 약화되었다. 그리고 최후 심판의 날 맨 먼저 불탄다.
이젠 우리들의 상황으로 돌아와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밭은 교회, 밭주인은 하나님, 일꾼은 목회자를 포함한 사역자들 그리고 원수는 원수 마귀를 뜻한다. 알곡밭에 씨를 뿌리도록 사주한 것은 사탄이고 씨를 뿌린 자들은 사탄의 도구인 일꾼들이다.
왜 그네들은 건강한 교회를 방해하는가? 교회가 건강하고 왕성할수록 사탄의 영역이 축소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판 가라지들은 어떤 것들인가
첫째, 신학적 가라지이다. 본래 신학의 출처는 성경이고 신학의 목적은 바른 교회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학이 본연의 자리를 떠나 성경 없는 신학, 신앙 없는 신학으로 변형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무신론, 종교다원주의, 성 평등 따위를 신학화하고 합리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일부 신학 동향과 운동은 건강한 교회를 파괴하는 “가라지”들이다. 성경을 떠난 신학은 학문일 뿐 하나님을 배우는 신학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 성장을 막고 어지럽히는 신학은 그 존재 가치가 없다.
둘째, 이단 사이비 가라지. 이네들은 조직적 훈련과 집요한 전략으로 교회 속으로 파고든다. 교회의 부정적 단면을 공격하고 비리라며 들추어내고 일대일 성경 공부라며 회유하고 기성교회의 약점을 절묘하게 악용한다. 편안한 교회보다는 문제가 있거나 다툼 조짐이 있는 교회, 목회자의 지도력이 약한 틈새를 노린다. 마치 연탄가스와 같다. 파괴의 잔인한 비수를 숨긴 채 스며든다. 교회 상황 따라 침투 요원과 전략을 바꾼다.
셋째, 자생 가라지. 교회 내에서 자란 가라지들, 이들도 만만치 않다. 대부분 기득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소외당했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 요직에서 제외됐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 이들은 하나같이 불평을 늘어놓고 비난의 활촉을 당긴다. 그리고 세를 규합해 집단행동을 하기도 한다.
넷째, 세속화의 가라지. 너나없이 요즘 교인들은 세속화에 침전돼 가고 있다. 편의주의, 인본주의, 물량주의, 타협주의에 익숙하다. 그래서 교회 강단은 심판, 회개보다 번영, 축복, 성공 이야기가 주종을 이룬다. 교인들의 기호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심령을 갉아먹는 가라지들이다. 축제만 있고 통회기도는 없다. 성공만 가르치고 낙법은 가르치지 않는다.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보다 교인들이 좋다는 것을 따른다.
가라지로 몸살 앓는 현대 교회가 할 일
현대 교회, 그리스도의 피로 일군 밭마다 가라지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처 방법은 있는가?
첫째, 바른 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신학은 학문이지 성경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학은 신학자들이 만든 학문이다. 그래서 신학이 성경 위에 군림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사건이 벌어진다. 바른 신학,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고백하는 신학, 교회를 지키고 울타리가 되는 신학, 인본주의나 과학주의와 결탁하지 않는 신학이 바른 신학이다. 신학이 흔들리면 교회가 흔들리고 신학이 두 쪽 나면 교회가 분열되고 신학이 성경을 떠나면 사멸의 위기가 온다.
둘째, 생활신앙을 확립해야 한다. 우리네 약점은 신앙보다 생활 즉 삶이 부실하다는 것이다. 예배 출석, 철야, 금식, 성경 공부, 교회 봉사, 기도회는 열성이지만 삶의 현장으로 나가면 전혀 다른 두 얼굴로 변한다. 그런 면에서 생활신앙이 강화되어야 한다. 밭에서뿐 아니라 밖에서도 “역시 알곡은 알곡이다”라는 평가를 얻어내야 한다. 알곡인가 가라지인가에 대한 식별은 현장에서 드러나는 삶의 열매로 가능하다. 그래서 잘 살고 잘 믿는 것보다 바로 살고 바로 믿는 것이 소중하다.
셋째, 철저한 훈련이 필요하다. 이단, 사이비, 교회 파괴 세력 등에 대한 철저한 정보 확인, 구체적 훈련 교재, 각 부서에 알맞은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전교인을 훈련해야 한다. 알곡이 시들거나 자라지 못하는 빈 땅에서 가라지는 무성하기 때문에 어느 곳도, 어느 부서도 빈 땅이 없도록 훈련하고 방어진을 구축해야 한다.
건강한 교회란 통전적 건강, 종합적 건강, 전인적 건강을 지키는 교회이다. 밭이 넓고 클수록 가라지 바람도 드세다. 거대 한국 교회와 크게 성장한 개교회들은 정신 차리고 가라지를 막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