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숨어 있는 상한 감정이 삶에서 나오는 성향들 - 김만홍목사(은혜샘교회 담임)
2021.03.31 11:50
숨어 있는 상한 감정이 삶에서 나오는 성향들
김만홍 목사 (은혜샘교회 담임)
인간은 누구나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상한’이라는 표현은 무엇에 찔린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육체적인 찔림이 아니라 내적인 찔림이다. 육체가 찔린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찔림은 인간관계에서 마음이 찔려 내면에 상처를 입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인간관계에서 상처받고, 이리저리 채이고 찢겨서 상한 마음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렇듯 인간의 모든 삶에는 아픔과 상처들이 숨어 있다. 만약 아픔과 상처가 없다면 우리의 의사가 되시는 주님이 필요치 않을 것이며, 우리 서로를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한 감정을 인정하고 치유해야 한다.
이제 ‘숨어 있는 상한 감정이 삶에서 나오는 성향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완벽주의 성향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은 성공 지향적인 사람이 되어 물질적 성공과 지적인 성공,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 생활 가운데 모든 것을 더 잘하려고 노심초사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며 성공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한다.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취할 수 없는 기준을 제시한다. 따라서 완벽주의를 가진 사람은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완벽주의가 왜 형성되는가? 그들의 부모가 늘 완벽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노력하여 조금의 성공을 거두어도 부모가 더 잘하라고 요구하며 인정해 주지 않아 완벽주의자가 되었다. 그 결과 사회에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둘 수도 있으나 그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더 잘해야 된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데이빗 스툽(David Stoop)은 완벽주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완벽’이라는 단어의 뜻은 ‘흠이 없고 결함이 없으며, 지극히 높은 기준과 최고의 표준’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찌 이러한 기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잘못도 없고 전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완벽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망에 이르게 하는 기준이다. 결국 인간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가장 잘못된 태도이다. 인간에게 완벽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완벽주의자들은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내면에서 마땅히 이러저러해야만 한다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완벽주의는 완벽을 이루려는 욕구와 그에 따른 좌절감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경험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완벽주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우리에게 복된 소식은, 완벽한 행동은 우리가 하나님께 다다르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우리의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의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보통의 수준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실적을 다른 사람들의 실적과 비교하기보다 자신이 기대했던 수준과 비교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능력과 비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이유가 없다. 보통이라는 수준을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첫째, 완벽주의보다 탁월함을 추구한다. 이것은 모든 부분에 완벽해지기보다는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탁월함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 공감하는 목표를 세우고 합리적인 성취를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목표와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을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으로 괴롭히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을 몰아세우지 않는다.
둘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다. 완벽주의를 치료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것은 죄 많고 무가치한 인간을 만나 주시는 하나님의 본질이며 그분의 행위의 본질이다. 이것은 값없이 주어진 값진 선물이다. 완벽주의는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시는 은혜의 관계를 믿고 인식하고 살아감으로써 치료되기 시작한다.
셋째, 삶을 변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한다. 인간의 행복과 기쁨은 인생 여정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용서와 용납을 체험하고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용서할 때 누리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 완벽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을 완벽하게 이루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본성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며 인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완벽주의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동의하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만일 일생 동안 완벽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추구한다면 마음은 불안해져서 인생에 찾아오는 조그만 기쁨과 만족을 전혀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주어진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어떤 완벽한 성취에서 오는 즐거움보다 훨씬 더 즐겁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의 부족한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완전한 용납을 경험하며 누려야 한다.
낮은 자존감의 성향
낮은 자존감은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내적 가치를 보지 못하고 외적인 것으로 자신을 평가하여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낮은 자존감은 자신을 애써 고립시키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자기중심적이라고 비난받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심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서 의기소침하며 괴로워한다.
낮은 자존감이 형성되는 원인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를 당했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납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자신이 사랑받고,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있을 때 우리는 행복을 경험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사랑받거나 용납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거부를 당한다. 거부당한 사람은 불안해하고, 자존감이 낮아 결국 자신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자책감을 갖고 자신을 학대한다. 그 자책감이 심하면 우울증으로 이어지며, 심지어는 자살까지 선택한다. 그래서 삶이 불행하고 가정이나 학교에서도 자신감이 없어 인생의 실패자로 살아간다. 그들은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은 사랑받지 못했으므로 사랑을 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우울하고 힘이 없고 외롭게 느껴진다. 사람들을 사귀지 않고 집안에 갇혀서 외부 출입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정서적인 고립 상태에 빠진다. 감정이 메마르고 느낄 줄 모르고 우울증에 빠진다.
낮은 자존감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먼저 우리는 우리에 대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용과 격려와 인정과 자극으로 자라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는 조화를 이루고 인격을 성장시킨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한 자신을 치유하려면 먼저 자기 수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을 비난하고 호되게 꾸짖고 거부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두 팔로 자신을 감싸 안아야 한다. 자신은 사랑스러우며, 올바르며, 가치 있고, 능력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자신의 거부당한 상한 감정 때문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제한해야 한다. 본인이 자신을 수용하지 않는 한 결코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상처받고 거부당한 자신을 비판하지 않고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를 배워야 한다.
자신을 수용할 수 있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몇 가지 일들을 실천해 보아야 한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실천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거나 스스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적성에 맞고, 지금 실천하여 성공할 수 있는 일들을 발견하고 성공함으로 참다운 즐거움과 만족을 발견해야 한다. 자기 수용과 높은 자존감은 자신이 성공한 일들과 더불어 시작된다.
우리는 자신의 느낌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기초하여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어 생각할 때, 우리의 가치를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우리의 가치를 귀하게 평가하고 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이룬 업적이나 앞으로 이룰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최고의 값을 지불하셨다. 기꺼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지불하셨다. 그분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가치를 정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을 만큼의 가치를 지녔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은 자존감을 치유할 수 있다.
수치심의 성향
수치심은 자신이 결점투성이고, 나쁘고, 불완전하고, 부패되고, 형편없으며, 부적합하거나 실패작이라는 인식을 하게 될 때 경험하게 되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죄책감은 무엇인가를 잘못했을 때 오는 감정인 데 반하여, 수치심은 우리 존재 자체가 무엇인가 잘못되었거나 나쁘다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죄책감은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면서 치유를 경험할 수 있지만, 수치심에 대한 치유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올바른 인간관계 안에서도 건전한 수치심을 느끼기도 하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잘못된 관계 안에서는 마치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꾸미고 아무에게도 그것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수치심을 가지고 있다. 수치심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인간의 특징이다. 우리가 수치심에 정면으로 대처하고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점점 더 축적되고 점점 더 큰 짐이 되어서 결국 우리를 망친다. 수치심은 자기 자신을 결점투성이며 부적합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우리 내면의 결점까지 훤히 꿰뚫어 볼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수치심은 자신이 무가치하며 그 무가치는 개선될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든다.
우리의 수치심은 자라는 동안 듣게 된 부정적인 말들, 부정적으로 단정 짓는 언어나 신념, 규범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어리고 나약한 위치에서 우리는 부모나 부모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 교사나 성직자 등 권위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단정적인 말을 반복해서 들을 때, 그들은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의 말이므로 그 말을 믿어 버리고 그러한 말들을 우리의 존재 속으로 통합시켜 버리거나 내면화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해서 생겨난 상한 감정은 부정적인 규범들과 결합하여 우리의 고통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조차 억압하고 금지한다.
그러면 이러한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우리를 억압하고 얽어매는 수치심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그것은 안전하고 우리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수치심을 자신의 힘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곤경과 고통을 확인하고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해 줄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수치심을 경청함으로 그들의 치료를 도울 수 있다. 그렇게 돕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이 된다. 그러한 나눔과 경청을 통해 우리는 피차 무조건적인 사랑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수치심의 치료를 방해하는 장애물도 있다. 우리가 수치심에 대한 치료를 시작하게 되면 우리는 곧 치료를 계속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내적인 장애에 부딪치게 된다. 그러한 장애는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우리가 치료를 위하여 대면하는 사람들 속에서 전에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던 사람들의 얼굴이나 다른 영상들이 떠오르는 것, 현재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어느 순간에든 일단 우리가 부모 등 권위적인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떠오르면 즉시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게 될 수 있다. 그러한 분노는 곧 수치심으로 바뀌거나 감추어지게 된다. 우리는 또 두려움이나 혼란된 감정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러한 감정들은 너무나도 강하게 우리를 압도하게 되고 우리는 두려워서 그러한 감정들을 모두 억제하고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일어나는 수치심의 사슬에 대하여 알아야 이기는 방법도 배울 수 있다. 다음 단계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한두 번 천천히 깊은 심호흡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혼란, 무감각, 역기능적 태도를 갖는 대신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그 상황에서 주도권을 더 잘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만일 우리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그들과 감정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다. 또한 우리를 잘못 대하고 있는 사람을 떠날 수도 있다. 우리는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인식은 우리의 수치심을 치유하는 첫걸음이 된다.
상실감의 성향
상실감은 정서적인 상한 감정이다. 상실감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잃어버리거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과 기대하는 것이 없는 상태로 살아야 할 때 느끼는 슬픔 감정이다. 우리가 슬픈 감정을 경험할 때 안전하고 우리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과 나누며 슬픔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해결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상실감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해결하는 시간도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실의 슬픔을 해결하지 않으면 불면증, 통증, 신체적인 질병, 정서적으로 탈진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릴 때 상실의 고통을 슬퍼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자라면 어른이 된 이후에도 여러 가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첫째, 의미 있는 관계 가운데 있는 중요한 사람을 상실할 때 슬픔이 찾아온다. 이별, 이혼, 거부당함, 버림받음, 죽음, 낙태, 사산, 질병, 이사, 가출 등이다. 둘째, 자신의 일부를 상실할 때 슬픔이 찾아온다. 생김새, 질병, 사고, 기능의 상실, 통제력 상실, 자존감, 독립심, 여러 가지 기대들, 욕구, 문화 충격, 직업 등 다양하다. 셋째, 어린 시절에 건전한 양육을 받지 못하고,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서 생기는 상실감이다. 성장기에 필요한 여러 종류의 아동용품들을 가지지 못할 때나, 가족과 이별하는 경우도 상실감이 생긴다. 넷째, 성인으로서 중년기의 여러 가지 변화를 경험할 때 상실감을 경험한다. 다섯째, 외형적인 물건으로 돈, 재산, 필수품들, 자동차, 수집품들을 상실할 때 슬픔을 경험한다.
상실은 개별적으로 일어나지만 나중에는 무의식 세계에 누적되어 고통이 커진다. 상실감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면 상실된 현실을 의기소침한 감정과 신체적인 아픔과 고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결과 자존감은 더 낮아지고 위축되어 버린다. 그러나 상실에 대해 슬픔의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면 상실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신체적, 심리적으로 행복을 되찾게 된다. 우는 횟수나 강도가 감소되고 자존감을 회복한다.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생활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상실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을 회피하려고 상실에 대하여 계속 부인하고, 이상한 논리로 합리화하고, 감정을 억제하며, 알코올이나 약물을 사용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 집요한 노력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잠시 위안을 받을지는 몰라도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는 태도는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를 다루는 네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로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상처를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다. 둘째로 자신의 상처를 표현하지 못함으로 신체적인 질병과 정신적인 질병에 고통당하며 나중에는 폭발해 버리는 것이다. 셋째로 알코올이나 다른 약물을 사용하여 고통을 완화시키려 노력한다. 넷째로 안전하고 자신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상처의 고통을 표현하고 극복해 나간다. 여기서 우리는 네 번째 방식으로 우리의 상처를 극복해야 한다.
소극적인 성향
소극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너무 과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소극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대체로 따분해하거나 열의가 없고, 일에 대한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없으며, 늘 불평하고, 진정한 인생의 목표를 세울 수 없으며, 그 목표를 위해서 전진할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만 의존한다. 의욕이나 활력이 없어 소극적이며 불만에 사로잡혀 있다. 스스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
소극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책임지도록 행동하려 한다. 그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소극성과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모든 것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의존심이다. 직장에서도 그들은 대체로 근무성적이 불량하고, 자기에게 할당된 일에 대해서는 무엇이나 불평을 늘어놓는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어떤 의미 있는 만족을 찾지도 못한다. 그러한 노력을 하려면 불편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소극성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고수하면서, 행동을 취해야만 될 환경에 처하면 언제나 우는소리를 한다. 오늘의 현실에 대처함에 있어서도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은 자주 자기와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들은 주도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고, 피로와 두려움과 선입견 같은 것으로 수동적인 사람이 된다. 자신의 인생에 어떤 방향을 제시해 줄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며, 특별히 애정을 베푸는 일과 성적인 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행복한 관계를 위한 어떤 책임도 맡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충분한 관심을 기울여 주고 자신의 필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는 상대방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를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 또 항상 다른 사람을 의존한다. 기대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으며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극적인 성향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그들은 무익한 자기비판과 자기멸시로 나아가려는 충동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안에 더 많은 방종을 원하는 불만스러운 요구들이 있다는 것을 정중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의존하려는 자신의 성향에 엄격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자신의 권태로운 소극적 태도에 빠져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호응해야 한다. 자신을 가혹하게 비난하고 열등의식에 빠지는 일 없이 참을성 있고 꾸준하게 발전해 나감으로써 지난날 자신들의 소극적이고 의존적인 역할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심오한 만족감을 맛보기 시작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소극적이고 의존적인 역할을 하면서 느꼈던 자신의 친숙하고 편안한 감정이 주는 안도감을 잃겠지만, 과거에는 언제나 지겨운 고난으로 여겼던 책임과 노력을 떠맡고 힘써야 한다. 이 같은 내적 갈등을 통해 빠른 시일 내에 보상을 받을 수는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최초의 만족은 더디 찾아오겠지만,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필경엔 걸음마를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참된 의미의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그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글/김만홍 목사
킹스웨이대학교 상담학 박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미술치료교육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현재 은혜샘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내면아이 치유상담》, 《상한마음 상담치료》, 《완전한 복음》, 《치유회복 상담콘서트 시리즈 7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