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스케치] 나의 23년 아랍 선교 여정 - 김은숙 사모(요르단 선교사)
2021.05.20 15:48
나의 23년 아랍 선교 여정
김은숙 사모 (요르단 선교사)
Bahrain
큰아이 다훈이가 만 두 살이 되어갈 즈음 우리는 ‘두 바다’라는 뜻을 가진 아주 작은 섬나라, 바레인이라는 곳에서 아랍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바다 빛이 수시로 바뀌는 가운데 초록빛을 내기도 하는 바레인의 바다는 참으로 아름다웠고 우리 가족은 바레인한인교회와 함께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둘째 아이 출산을 한 달 앞두고 있을 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웃 나라 쿠웨이트를 침공하였다. 대국 이라크가 바레인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굳이 군대를 보낼 필요도 없이 그 당시 막 보급되던 팩스 한 장이면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바레인의 모든 병원도 군인들을 위한 병원으로 준비될 것이라고 하여, 나는 큰아이와 함께 급히 한국으로 떠밀려 나와(곧바로 후회하기 시작함) 출산하게 되는 번거로움도 겪었다.
전쟁의 문턱에 홀로 남아 있는 남편이 너무나 걱정되고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온 식구가 함께 전쟁이든 그 무엇이든 같이 있으면서 겪고 싶었다. 산후조리를 마친 후 생후 1개월 남짓 되는 둘째 다윗과 이제 막 세 살이 된 큰아이 다훈이를 데리고 서둘러 바레인으로 돌아갔다. 바레인에 돌아가 보니 미군 주도의 다국적군이 쿠웨이트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이라크를 침공하는 걸프전쟁이 본격적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화학전을 대비해 우리 대한민국 정부에서 방독면을 보내주었다. 남편이 대사관에서 방독면 2개를 받아와서는 완전 신품이라고 야단법석을 떨며 좋아했다. 그는 논산훈련소에서의 방독면 조교생활을 되살려 나에게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그때 나는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남편은 나의 슬피 우는 모습을 보고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우리 둘의 것은 있는데 우리 두 아이들 것은 없지 않느냐?”고 되묻자 정신을 번쩍 차렸다. 아니, 있다 한들 그들이 방독면을 어떻게 착용할 수 있겠는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그때 얼마나 울었던지….
남편은 조용히 방독면 뭉치를 창고에 집어넣고 진지한 기도의 시간을 갖기 시작하였다.
전쟁은 곧 시작되었다. 우리 네 식구는 바그다드에서 날아온 스커드 미사일과 그 미사일을 막기 위하여 바레인에서 쏘아 올린 패트리엇 미사일과의 충돌로 인한 굉음 때문에 몹시 흔들리는 집안에서 비상식량을 먹으며 전쟁을 통과했다.
Jordan
1993년 여름, 셋째 딸 다희의 출산을 한 달 반 앞두고 우리 가족은 아랍권 선교에 전무할 목적으로 요르단에 정착하게 되었다. 낯선 땅 그것도 방 두 칸의 작은 집에서 한 살, 네 살, 일곱 살 된 아이들과 겨우 생존하고 있을 때,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이라크인 한 명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의 이름은 루메일이었는데 요르단에 막 입국한 목회자 후보생으로 나보다 두 살이 어렸다. 당시 이라크에는 신학교는커녕 이라크의 자국인 목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학교가 있는 이집트나 레바논으로 유학을 가기 위하여 유일하게 국경 문이 열려있는 요르단으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정말 소중한 한 명의 헌신자였다.
남편은 두 아들을 거실로 내몰고 루메일에게 방을 쓰도록 했다. 남편은 루메일과 함께 그 방 안에서 한 통수가 되어 아랍선교를 위한 열정의 불꽃을 튀겼다. 남편은 잠꼬대까지도 아랍어로 하곤 하였다.
Iraq 난민목회
우리 집은 자연스럽게 루메일이 데려오는 이라크인들을 맞이하고 환영하며 그들의 새로운 정착에 도움을 주고 서로 동지애를 키워가는 장소가 되었다.
12명 정도가 매주 우리 집에 모여 말씀공부를 하다가 이웃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요르단 교회당으로 모임을 옮기면서 우리는 요르단 땅에서 이라크인 난민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 전쟁을 겪으며 그들의 뼈저린 아픔과 고통, 슬픔 또 환희, 기쁨이 어디서 오는지 지켜보면서 우리는 어느새 그들 속에 함께 있게 되었다.
전쟁은 가족들을 뿔뿔이 흩으며 그들의 생존을 흔들었다. 환영해 주지 않는 나라에 겨우 들어와 숨죽이며 희망 없이 살아야 하는 이라크인들이 매주 우리 교회에 모여오기 시작했다. 30명, 50명, 100명, 200명. 나는 이때 완벽한 언어로만 선교하는 것이 아님을 배웠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형편없는 아랍어 실력을 핑계 대며 징징대고 짤 겨를도 없이 우리를 사용하셨다. 전쟁이 꼭 고통만은 아님도 배웠다. 요르단이라는 정거장에서 수많은 이라크인들이 주님을 만나는 현장을 목도하는 행복을 우리는 맛보았다.
요르단에서 이라크인 난민 목회를 시작한지 1년쯤 되었을 때, 요르단에 최초의 개신교회 신학교가 합법적으로 세워졌다. 우리 교회의 루메일을 포함한 6명의 형제들이 신학교 개교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얼마 후 남편도 그 신학교에서 교수사역을 시작하였다. 계속해서 주께 헌신하는 이라크인이 늘어나고 신학생도 늘어났다. 한국교회도 이들의 신학수업과 이곳 요르단에서의 난민교회 개척에 큰 몫을 감당하였다. 할렐루야! 이라크는 지금 자국인 목회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아졌다. 이라크인 복음화를 위하여, 주의 종들의 신학수업을 위하여 수고한 한국교회에 이 자리를 빌려 크게 감사를 드리며 한국교회를 사용하신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Baghdad, Iraq
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 남편은 이라크 바그다드에 신학교를 세웠다. 이라크 상황이 여의치 않아 가족은 요르단에 두고 남편 혼자서 바그다드에서 생활했다. 당시 바그다드와 암만을 오가는 길에서 피랍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하고, 이라크 이곳저곳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고소식으로 인하여 얼마나 가슴 조이며 기도하였는지 모른다. 그때 한국인 목회자 7명이 바그다드 근처에서 피랍되었다가 풀려났는데, 남편이 그들을 인솔하여 암만으로 나왔다. 그후 얼마 있다가 남편의 사랑하는 대학 후배이기도 하고 한국과 바그다드에서 남편과 귀히 교제하였던 김선일 형제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아직도 이라크는 우리 한국선교사들에겐 입국 금지국으로 남아있다. 이라크는 아직도 큰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신음소리를 계속 내고 있다. 거대 이슬람 속에서 생존에 몸부림치는 절대 소수의 교회와 남은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기도를 멈출 수 없다.
이라크 난민들과의 이별
수많은 이라크 난민들이 지금은 여러 서방세계에 정착했다. 우리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며 이곳 요르단에서 신학을 마치고 목회자가 된 그들은 지금 흩어진 그들의 동족들을 위해 목양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정들었던 그들과 헤어지는 것은 아픔이요, 그들이 불법체류자로서의 이곳 생활을 청산하고 서방세계로의 새롭게 열린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떠나가는 것은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큰 기쁨이었다. 그들은 우리 다섯 식구에게 평생 잊지 못할 많은 추억을, 그리고 보람을 안기고 거의 다 떠나갔다.
요르단인 교회 목회
우리 이라크인 교회가 몸담고 있던 요르단 아슈라피아교회가 산동네를 떠나 더 좋은 곳에 새 교회당을 지어 이사를 갔다. 그 이사 대열에 함께 하지 못한 요르단인 교우들이 슬퍼하며 우리에게 도움을 구하였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교회당을 임대하여 이라크인뿐만 아니라 요르단인들까지 목회하게 되었다. 산동네를 누비며 이 집 저 집 심방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그 후, 중동한인기독실업인 장로님의 후원을 받아 임대교회당 시절을 마감하게 되었고 이제는 앞마당까지 있는 자체 교회당 시대를 펼쳐가고 있다.
요르단에는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나 법적으로는 기독교인이어도 복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이 아주 많다. 그들은 새롭게 복음을 들어야 할 우리의 전도 대상이다. 그들의 집에는 어김없이 마리아상이 있는데 마리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주 예민한 문제이다. 지혜로운 접근이 필요하고, 쉽지만은 않은 방문이 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온전한 복음을 그들이 들을 수 있도록 요르단 교회는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요르단의 기독교는 정교회와 천주교회가 절대다수이고, 개신교회는 57개 정도로 약 8,000명의 교인이 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여전히 정교회나 가톨릭교회에 한 발을 딛고 있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랍 신학생과 목회자들 강의
우리는 요르단의 한 교단에 속하여 목회자 비자를 받고 합법적으로 교회의 목회자로서 일하고 있다. 또한 20여 명의 요르단인, 이집트인, 시리아인, 수단인 등의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신학교육을 시키며 아랍교회가 보다 더 강건해지도록 한 몫을 감당하고 있다.
우리 집에서 매주 세 팀의 강의가 있다. 나는 그들을 위해 차와 과일, 그리고 간식을 준비한다. 그들이 외국인의 어설픈 언어로 강의를 들으며 얼마나 피곤해할까 생각되어 막간의 먹는 즐거움을 주고자 기꺼이 브레이크 타임을 갖는다. 그들 한 분, 한 분을 한 교회로 생각하며 섬긴다. 이미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아직 그렇지 못한 신학생도 한 교회의 담임이 될 것을 생각하며, 그들이 섬길 교회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열심히 심는다.
얼마전남편이 정보부에 불려가“집에서도 강의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후 부담이 되어 지금 우리 내외는 신학강좌를 위한 장소를 알아보고 있다. 이곳 요르단은 교회 안에서의 모든 집회가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가정집이나 거리에서의 종교 활동은 불법이다. 사실 우리 집에서 신학강좌를 약 2년 동안 지속해 오면서 더운 날 창문을 열지 못할 때도 있었다. 강의 소리가 옆집, 앞집 창문을 통해 알려지면 고발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회 탄생에 대한 기대
지금 우리는 강의 센터와 교회당으로 겸하여 사용할 집을 구하는 중이다. 센터와 교회로 사용될 집을 허락해 줄 집주인을 찾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산 넘어 산을 넘는 일이지만 벌써 우리는 설렌다. 아랍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을 위한 강의센터로 또한, 또 하나의 요르단 개신교회가 세워지는 역사적인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때 우리가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요르단 정부가 이슬람 국가이지만 교회를 인정해 주고 목회자 비자까지 허락해 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요르단을 비롯한 온 아랍국가의 영혼들에게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길 기도드린다.
- 라일락 10호 / 해외스케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