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용서이다 - 윤종현 목사 (국제생명나무사역 대표)
2021.09.13 15:04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용서이다
윤종현 목사 (국제생명나무사역 대표)
나의 은사였던 고(故) 부르스 리치필드 박사는 말하길 기독교 상담과 치유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내가 받은 상처를 용서하는 것이다. 나는 20여 년 동안의 치유 사역을 통해서 이것이 증명되는 것을 여러 번 보아 왔다. 이번 글에서는 그중에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용서를 정의하자면 은혜롭게 되는 것, 자유롭게 주는 것, 빚을 탕감해 주는 것, 죄를 용서해 주는 것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은 것은 그 사람이 내게 빚을 진 것이다.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용서다. 또한 우리는 용서할 때마다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반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가장 놀라운 사랑은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것이다.
중국에는 ‘용서하지 않는 것은 두 개의 무덤을 만드는 것’이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상대가 죽기를 바라면서 내가 독극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결국 나와 상대방, 두 사람을 모두 죽이고 만다. 어떤 경우는 상대방은 죽지 않고 나만 죽기도 한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그 상처를 품고서 오랜 시간 상대방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정죄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내가 받은 상처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된다.
그렇게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상처 준 사람을 만나면 피하고 싶기도 하고, 그 사람을 떠올리면 억울하거나 분노를 쏟아 내고 싶기도 하다.
어떤 때는 대상은 잘 모르겠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것 같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기도 하고, 혹은 이유 없이 몸이 아프기도 하다. 악몽을 자주 꾸기도 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 있다면 용서에 대해 점검해야 할 부분은 없는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 삶에 용서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용서의 원칙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용서의 원칙 이해하기(마 18:21~3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베드로는 의문이 생겼고, 손을 들어 질문하였다. “예수님, 누가 나에게 잘못을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나요? 일곱 번 하면 될까요?” 그러자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라”라고 말씀하시며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의 비유를 드신다.
원칙 1: 용서는 상대의 반응과 관계없이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베드로는 아마 불편한 관계에 있는 누군가가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같이 공동생활하는 다른 제자들과의 갈등이 있었을 수도 있다. 수제자인 자신이 여러 번 용서하지만 상대는 변하지 않을 때, 용서의 한계가 몇 번인가 알고 싶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상대의 반응에 따라서 용서를 할지 말지 결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 가운데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질문한 것은 아닐까? 그런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상대와 관계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용서는 상대가 회개하고 잘못을 빌면 용서하고 그렇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와 관계없이 주도적으로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내 책임이다.
원칙 2: 용서는 회계 장부가 필요하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한다. 먼 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왕은 그 많던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회계 장부를 가져오라고 한다. 이것을 용서에 비추어 보자. 용서는 회계 장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해진 날에 셈을 맞추어 본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이다. 회계 장부에는 누가 나에게 언제, 얼마만큼의 돈을 빌려 갔는지, 얼마나 갚았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그 상처에 대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용서는 상처 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처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어디에서 상처가 비롯되었는지를 알 때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친구 주드 모리스는 자신에게 상처 준 430명에 대한 용서 리스트를 만들었다. 한 사람으로
부터 여러 번 상처를 받은 경우도 많았다. 그 리스트는 노트 두 권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그는 이 노트를 기반으로 10년 넘게 상처들을 용서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처럼 용서를 할 때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용서하는 과정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 시간이 날 때마다 노트에 내가 경험했던 상처들을 적어 놓으라. 그리고 한 번에 한 사건씩 용서해 나가보라.
원칙 3: 빚진 자는 결코 그 빚을 갚을 수가 없다.
또 예수님은 빚진 사람이 빌려 간 돈이 일만 달란트라고 하셨다. 일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 정도 되고, 일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일만 달란트는 계산하기도 어려운 정도의 많은 돈이다. 일만 달란트가 상징하는 바는 결코 갚을 수 없을 만큼의 큰돈이라는 것이다. 즉 내가 받은 상처는 다시 돌려 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복수함으로 그 상처를 치유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복수를 주제로 하는 영화들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수는 또 다른 상처와 복수를 낳을 뿐이다. 상처받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용서 외에는 이 빚으로부터 자유케 될 수 없다.
원칙 4: 상처받은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라.
일만 달란트를 빌려 간 사람이 못 갚는다고 하자, 왕은 말하길 너의 가진 모든 것 ― 아내, 자식, 전토를 팔아서 갚으라고 했다. 왕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상처받았을 때 정상적인 반응이다. 누군가 내 발을 밟았는데, 기쁘고 즐거울 수는 없다. 용서를 하려면 먼저 내 안에 있는 분노를 쏟아 내야 한다. 내가 받은 상처를 인정하고,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압력밥솥에 압력이 가득 차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거기에 아무리 용서를 밀어 넣으려고 해도 들어가질 않는다. 먼저 ‘분노’라는 수증기가 빠져나와야 용서가 들어갈 수 있다. 먼저 나의 내면 안의 고통과 억울함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때로는 정직하게 내가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인정해야 한다. 다윗이나 한나처럼 하나님께 나의 고통을 정직하게 쏟아 놓으라. 그래야 용서가 가능해진다.
원칙 5: 진정한 용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용서에 대해 말할 때 의지적으로 선택하라고 한다. 용서하기로 결정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여전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머리에서는 용서했지만, 마음이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용서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용서가 안 돼요”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상처는 대부분 정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용서되어야 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자발적인 긍휼함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용서는 결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반드시 마음 전체가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너의 마음의 중심으로 각각 용서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셨다. 마음의 중심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모두 사용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처음에 빚을 다 갚으라고 했던 왕도 빚진 자의 애원을 듣고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놓아 보냈다.
원칙 6: 용서와 화해는 다르다.
용서했다고 해서, 왕과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의 관계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용서는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화해는 두 사람이 같이 해야 한다. 즉 상대방이 원하지 않으면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용서하면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가 나를 계속 학대하고 상처를 주고 괴롭힌다면 그러한 상처와 학대를 견뎌야 하는 것인가?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속적인 상처와 학대의 관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누가 나의 발을 계속 밟는데 계속 괜찮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 내 발을 계속 밟는다면 밟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적절한 행동이다.
내가 학대받고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는다. 때로는 학대와 상처를 고난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고난이라는 것은 내 안의 정체성이 그 고통보다 클 때 고난이라고 말한다. 내가 가진 고통이 정체성보다 클 때는 상처가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내적인 역량보다 더 큰 아픔을 경험할 때 그것은 학대와 상처가 되는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용서의 원칙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해 주시는 일들이 있다
면, 한 번에 한 가지씩 기도하라. 오랫동안 고통을 주었던 상처라 할지라도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특히 교회에서 사역하거나, 선교지에서 사역하다 보면 상처를 주고받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것은 마음에 가시가 박히는 것과 같은 경험이다. 그 가시들을 뽑지 않고 가만히 두면, 마음이 상하게 되고, 우울증으로 고통받기도 한다. 이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다가 더 큰 어려움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면 도움을 구하자. 헨리 나우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내가 입은 상처를 치유받을 때 또 다른 사람
들을 도울 수 있는 치유자의 삶을 살 수 있다. 우리 모두 그런 삶을 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