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여성] 셀리나 헌팅던 백작부인 - 박창훈 교수(서울신학대학교)
2015.01.28 18:49
셀리나 헌팅던 백작부인
박창훈 교수(서울신학대학교)
성장기와 결혼
셀리나 헌팅던 백작부인(Selina, Countess of Huntingdon)은 영국의 부유한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서 귀족과 결혼한 교양 있는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가들이었던 메소디스트(Methodist: 존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참여한 자들로 기도, 금식, 성찬, 구제 등 성경에서 지시한 성결의 방법을 고지식하게 따른 자들을 지칭)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이며 후원자로 유명했다.
1707년 8월 24일 셜리(Shirley)가문의 세 딸 중 둘째로 태어난 셀리나는 부유한 집안에서 아름답게 성장했고 평생을 부유하게 지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아버지를 닮아 신중한 성격을 가진 그녀는 9살 때 겪은 친구의 죽음과 10살 때 만난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이생에서의 불확실한 삶과 내세의 삶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셀리나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간 방법은 바로 기도였다. 그리고 점차 숙녀로 자라난 셀리나의 기도제목은 자연스럽게 미래의 남편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다. 당시 귀족의 자녀들은 부모의 정치적인 이해관계나 가족의 이익에 의해 결혼 당사자가 정해지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녀가 기도하고 소망하는 남편은 귀족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경망스러움과 가벼움을 멀리한 ‘경건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배우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셀리나의 기도에 정확하게 응답하셨다. 남편은 테오필루스 헤이스팅스(Theophilus Hastings)로 그녀와 같은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 테오필루스는 학식과 여행경험이 풍부하였으며 피치 못할 사치스러운 귀족들과의 만남을 빼고는 조용한 농촌생활을 좋아했다.
고난을 통한 회심
결혼한 셀리나는 대저택을 경영하고 농장에 딸린 소작인들과 세입자 식구들을 돌보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은 단순히 자신에게 귀속된 재산을 관리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셀리나는 소작인들 가운데 병자, 여인과 아이들, 그리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시선을 두었고 그들을 돕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임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리고 차츰 그들의 육체적인 필요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필요를 채워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백작부인으로 사교계에 참석해서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귀족들의 화려한 시간 낭비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오히려 농촌의 한적하고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좋아했다.
남편과의 관계는 무척 행복했으며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이 부부의 큰 슬픔은 아이들로 인해 시작되었다. 19년의 결혼 생활 가운데 7명의 아이들을 두었는데 남편이 사망하기 전에 이미 2명의 아이가 천연두로 사망했고, 4명의 자녀도 셀리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서 그녀의 임종 때는 딸 한 명만이 남았다. 이러한 시련은 셀리나가 보다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셀리나가 자녀를 잃는 아픔을 겪고 있을 때 시누이 마가렛 헤이스팅스(Lady Magaret Hastings)는 그녀가 영적으로 다시 일어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마가렛은 당시 영국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존 웨슬리(John Wesley),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그리고 벤자민 잉햄(Benjamin Ingham)등의 설교를 듣고 깊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 그 중 잉햄 목사와 결혼하였는데 사실 마가렛은 잉햄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심을 했던 것이다.
마가렛이 자신의 체험을 셀리나에게 전하자 시누이의 기쁨의 증거에 셀리나는 특별한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 셀리나의 신앙생활에는 기쁨보다는 의무감이 지배했었다. 더욱이 셀리나는 중병을 앓고 있었는데 의사들도 그녀의 회복에 대해 절망적으로 여겼다. 질병의 아픔 속에서 셀리나는 이제까지 자신이 의무적으로 추구했던 경건생활이 타당했는가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삶을 돌아본 그녀가 얻은 답은 자신의 삶이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쓸모없는 많은 것에 자신의 생애를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의 의무감에 따른 신앙생활이 아무리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더라도 거기에는 귀족으로서의 자존심과 자만심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고 바로 그 자만심은 죄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셀리나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기로 결단하였다. 이 구원의 확신은 그녀에게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었으며 병도 기적처럼 깨끗이 낫게 되었다. 병에서 회복되자 셀리나는 남은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교파와 국경, 신분을 초월한 복음전파에 헌신
이즈음 셀리나와 존 웨슬리 목사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셀리나는 웨슬리 목사가 그녀의 집 근처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의 관심과 호의를 전달했으며, 런던에서 웨슬리 목사가 인도하던 페터레인 신도회(Fetter Lane Society)에 계속적으로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740년경 모라비안들과의 갈등으로 웨슬리 목사가 독립했을 때도 셀리나는 웨슬리 목사와 함께하면서 새로운 채플이었던 파운더리 모임에도 꾸준히 참석했다.
그녀는 웨슬리 목사뿐만이 아니라 조지 휫필드 목사의 설교도 듣고 그가 런던에서 설교할 때 천막예배당을 짓는 것을 돕기도 했으며, 런던과 여러 지역 성공회 목회자들이나 비국교도 목회자들과도 우정을 맺었다. 다시 말해 신앙이 살아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셀리나가 등장했다. 그녀는 메소디스트였으나 단순히 웨슬리 목사만을 따르던 사람은 아니었고 초교파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과 만남을 가졌다.
메소디스트 모임에 참석하면서도 셀리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간증하기도 했다. 그녀의 간증을 듣는 귀족 친구들에게는 자신들과 너무도 다른 셀리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큰 괴로움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셀리나의 남편이 그녀를 절제시키고 열광적인 헌신의 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남편은 셀리나를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결국 셀리나에게 자신의 옛 은사인 감독님을 한번 만날 것을 부탁했는데 성경, 국교회 신조, 설교집 등을 폭넓게 인용하며 자신의 신앙을 설명하는 셀리나를 보면서 오히려 감독 자신이 물러서고 말았다. 이후 남편은 셀리나의 활동에 자비로운 중립을 지키며 그녀의 활동에 어떠한 불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가 부흥운동을 하는 목사들을 집으로 초대할 때는 너그러이 허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편 테오필루스는 뇌졸중으로 1746년 10월, 19년간의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셀리나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겼다. 남편이 남긴 재산과 함께 셀리나에게는 친아버지로부터 받은 토지도 있었다. 또한 자녀들에게 상속된 재산을 아이들이 성장할 때까지 그녀가 직접 관리해야 했다. 그리하여 셀리나는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당시 여인이 재산을 관리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대개는 남성들이 이러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남편의 장례가 끝나자 셀리나는 새로운 사역을 할 것을 결심했는데, 그 기회는 사실 불행과 함께 찾아왔다. 넷째 아들의 건강을 위해 브라이튼(Brighton)으로 이주했을 때 셀리나의 아들은 어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셀리나는 이때 인근 가정들을 방문하며 자신의 아픔을 복음전파의 계기로 삼았다. 셀리나는 여기서 작은 신앙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이 모임을 통해 그 지역의 부흥운동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남편과 사별한 직후 셀리나는 런던의 귀족부인들을 중심으로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고 기도하며 성서를 읽고 또 상호 간의 경건과 신앙을 북돋는 모임을 시작하였다. 서로를 영적으로 자극하여 더 깊은 영성을 체험하도록 고무시키는 모임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활동은 이밖에도 여러 면에서 두드러졌는데 특히 웨슬리 형제나 조지 휫필드 등 당시 메소디스트들와 교류하며 신실한 조언과 카운슬링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셀리나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이면 어디든 관심을 갖고 폭넓고 광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그녀 자신이 세운 웨일즈의 트레베카(Trevecca)신학교와 그녀가 후원이사로 참여한 영국 전역의 채플(63개)을 중심으로 복음주의 부흥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것을 손꼽을 수 있다. 물론 셀리나가 단순히 물질적인 후원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부흥운동의 실제적인 내용을 영국의 상류층에게 전해서 그들의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려고 하였다. 영국의 상류층을 이루는 귀족, 감독, 그리고 조지 2세와 조지 3세 왕에게까지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긍정적인 면을 알리고 근거 없는 염려나 소문을 중재하여 변호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하인으로 있었던 데이빗 테일러(David Taylor)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은사가 나타나자 그로 하여금 마을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도록 했는데, 오래지 않아 먼 지역을 돌아다니는 전도자가 되도록 후원하였다. 특히 셀리나는 칼빈주의 부흥운동가들을 지원하는 가운데 선교를 위한 모임을 시작했다. 그녀는 준비된 목회자들을 선발하여 구체적인 재정 후원과 함께 전도여행을 직접 계획했는데 때로 2륜 마차, 4륜 마차, 그리고 하인들이 탄 마차와 짐칸의 대열이 긴 행렬을 이루는, 흡사 왕실의 행차와도 같은 십자군 전도대(the evangelical crusade)를 운영하였다. 이 부흥회에서 설교자들이 자유롭게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할 때, 귀족신분인 그녀가 강단 근처에 앉아있다는 존재감은 그 자체만으로 그 어떤 반대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셀리나는 독립 이전의 미국 땅에 선교사를 보내어 고아원과 농장을 통한 선교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실 자신의 최대 숙원사업으로 미국 복음화를 소망했다. 영국인 이주민, 흑인 노예, 그리고 미국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력하도록 기도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녀의 후원으로 복음을 들은 흑인들 가운데는 미국이 독립하자 서아프리카의 시에라 리온(Sierra Leone) 해방지역으로 파송되어 그곳에서 교회와 학교를 짓고 아프리카 선교의 전초기지를 건설한 이들도 있다.
평생을 경건하게 생활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지원했던 셀리나가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말은 “나의 일은 끝났으니 아버지께 가는 일밖에 없습니다”였다. 자녀들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로서의 슬픔을 평생 동안 안고 산 셀리나는 그녀가 헌신적으로 후원한 영적인 자녀들을 통해 보다 깊고 풍성한 은혜의 기쁨을 누리며 주님의 품 안에서 안식을 얻었다.
글/ 박창훈 교수
서울신대 신대원, 미국 Duke University 신대원, Drew University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온양성결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신대 교회사 교수로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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