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이제 다시 시작이다! - 장사라 선교사(몽골)
2016.05.10 14:20
이제 다시 시작이다!
장사라 선교사(몽골)
저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초등 예체능 전담교사 임용고시를 통해 초등교사로 일하다가 올 8월 31일을 끝으로 5년 6개월간의 현직 기간, 8년 6개월간 세 아이의 육아휴직 기간, 도합 15년간의 교사직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요즘 초등교사가 여자들에게 선망받는 직장 중의 하나인데 퇴직을 하는 저를 보며 제일 먼저 우려를 표현하신 분은 친정어머니셨습니다. “너 평생 선교지에 있을 것도 아닌데 한국 오면 뭐 먹고 살려고 퇴직을 해?” 하지만 초등교사직을 그만두는 것이 저에게는 한 점 아쉬움이 없습니다. 첫째는 선교사역을 그만둔 뒤의 미래는 주님께 맡겼기 때문이요, 둘째는 아이들 홈스쿨링을 통해 교직을 이어가기 때문이요, 셋째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좇아 살아가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나, 선교사 맞아?
저는 원래 선교에 대한 비전이 없었던 사람이지만, IT분야 연구원으로 일하며 전문인 선교사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인생 계획에 없던 선교사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결혼 후 3년 차 되던 해, 육아휴직 상태였던 저는 남편의 손에 이끌리어 17개월 된 딸과 함께 6개월간의 장기선교사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교의 ‘선’ 자도 제대로 몰랐던 저에게 선교 훈련의 과정은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선교학이니, 교회 개척이니 하는 아무리 귀를 쫑긋해서 들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 강의들, 써야 할 리포트는 또 왜 그리 많은지…. 남편의 선교 열정은 점점 더 불타 가고, 다른 여성 훈련생들은 애들 셋, 넷을 데리고도 열심히 훈련에 임하는 것 같은데 저만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훈련생들 간에 서로를 ‘선교사’라고 불렀는데 그 호칭이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제겐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수요예배와 아침 큐티 시간, 그리고 훈련생들과의 교제는 이런 힘든 시간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과 위로가 되었고, 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6개월이라는 긴긴 훈련의 시간을 무사히 끝내고 2007년 8월 17일, 선교사 신분으로 몽골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습니다.
몽골에 첫발을 내딛다
선교지에서의 첫 몇 개월간은 여행객과 같은 기분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도 알아볼 수 없는 거리의 간판들, 손짓 발짓 다하며 시장에서 물건 구입하기,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식당에서 현지 음식 먹기 등 모든 것이 새로웠고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몽골 사람들은 우리와 외모가 유사하기 때문에 마치 한국의 어느 낯선 곳에 와있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첫 겨울은 너무나 추웠습니다. 몽골의 겨울은 춥기도 추웠지만, 영하 30~40도라는 수치가 주는 위압감이 몸을 더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30~40년 된 아파트의 오래된 나무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냉기로 인해 밤에는 방 안에서도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봄의 흙먼지 바람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침만 해도 바람 한 점 없고 청명하던 하늘이 오후가 되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몰아치고 곧 흙먼지가 일어나 10m 앞을 내다보기도 힘들 정도가 될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몽골 사람들은 이랬다저랬다 갑자기 돌변을 잘하는 사람에게 ‘봄과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충분히 그 의미가 이해되었습니다. 새로운 땅에서 경험하는 불편함과 부족함은 여행자라면 참고 견딜 수 있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행자로서 가지는 흥분과 호기심들은 점차 사라져 갔고,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외국인이라는 사실로 인해 당하는 불이익으로 야기된 불평과 불만 등 이 모든 것들이 현실로 와 닿으면서 우리가 이곳에 선교사로 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새롭게 펼쳐진 이 삶을 더 이상 불평하며 여행객처럼 살아갈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문화 속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선교사의 삶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사 선교사로 첫 사역을 시작하다
남편은 거의 2년 가까이 언어 공부에 집중하느라 사역을 하지 않았지만, 저는 6개월 후 곧바로 울란바타르 선교사자녀학교 초등교사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울란바타르 선교사자녀학교는 선교지의 다중언어, 다중문화, 다중사회, 다중인종의 상황에서 언어·문화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선교사 자녀들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세워진 학교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 자랑스러운 한국인, 창의력 있는 국제인 양성을 목표로 유치원과 초·중·고 과정의 장·단기 교사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현직 교사 출신의 장기 교사 선교사가 왔다며 기쁘게 반겨 주었지만, 대상이 선교사 자녀들이고 한국어에 서툰 한-몽 다문화 자녀들도 여러 명이었기에 ‘이들을 사랑으로 잘 가르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마음 한편이 무거웠습니다. 달리 맡길 곳이 없어 유치원 5세반에 조기 입학한 네 살배기 딸아이와 함께 학교에 출퇴근하는 일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 가운데 부족한 모습이지만, 주께서 맡겨 주신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선교사 자녀 사역의 중요성과 이를 위해 더 많은 준비된 선교사들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교사자녀학교 사역 2년 차 되던 해에 남편은 언어 공부를 끝내고 대학 교수사역과 한국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의 청년부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과 더불어 선교사자녀학교 사역을 그만두게 되면서 전업주부 선교사(?)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전업주부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틈틈이 짬을 내어 남편이 사역하는 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리코더 교육을 하였습니다. 공립학교에서 음악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시작한 사역이었습니다. 아쉽게도 12명으로 시작해서 2명만이 교육을 수료해 실망감도 있었지만, 그동안 배우고 연습한 찬양곡을 학생들이 예배 시간에 연주할 땐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리코더 음악사역에 대한 가능성과 계획을 세워보게 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안식년, 회복과 변화의 시간을 갖다
둘째 아이 9개월 무렵, 모유 수유도 제대로 끝내지 못했는데 셋째를 갖게 되었습니다. 척박한 선교지 상황에서 임신한 몸으로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길고도 추운 겨울에는 밖에 나갈 엄두도 못 내는 현실 앞에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우울하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남편은 새벽같이 학교에 가서 바쁜 사역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항상 피곤해하였고,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거나 속마음 나누는 것을 잘 못 하는 남편에게 이런 힘든 마음을 나누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면의 불만족은 더 깊이 쌓여만 갔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4년간의 1차 임기를 마치고 셋째 출산 겸 안식년으로 본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안식년은 셋째 출산과 양육으로 인해 몸은 고달픈 시간이었지만, 남편의 변화를 통한 부부관계의 회복, 여행, 여가 활동, 사람들과의 만남 등을 통한 정서적 회복, 예배 및 기도생활회복을 통한 영적 회복으로 우울했던 마음이 많이 밝아진 시간이었습니다. 안식년을 보내면서 남편은 저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속마음을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선교지에서 꾹꾹 눌러 두었던 감정이 폭발해 서로 간에 갈등이 최고조 되는 시간을 거쳐야 했지만, 그렇게 곪은 부분을 터뜨리고 짜내며 주님의 은혜로 치유하는 시간을 갖고 나니, 예전보다 부부관계가 더 깊어지고 친밀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잠시 보내 놓고 남편과 함께 등산했던 기억, 생일 선물로 남편과 ‘미스 사이공’ 뮤지컬 공연을 정말 즐겁게 보았던 기억, 거액(?)을 들여 남편이 좋아하는 가수 이문세 씨 공연에 가서 어깨동무하고 펄쩍펄쩍 뛰며 함께 노래 불렀던 기억 등 지금도 그 시간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그렇게 안식년을 보내고 선교지에 돌아왔을 때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들은 첫마디가 제 얼굴이 너무 밝아졌다는 것이고, 남편 또한 정말 많이 변해서 돌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안식년을 통해 회복과 변화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다
어느덧 2차 임기의 절반가량이 지나고 있습니다. 1차 임기에 비해 더 볼 것도, 먹을 것도, 문화적으로 누릴 것도 없는 새로운 지역에서 세 아이 홈스쿨링을 하면서 전업주부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젠 더 이상 우울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전히 아이들과 씨름하며 매일매일을 보내고, 세끼 밥 뭐 해서 먹나 고민하며 지내다 보면 때때로 삶이 무료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선교적 사명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엄마와 아내로서의 역할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올여름 파송교회 대학부 단기팀과 함께 지역교회 성도 및 이웃초청 음악회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도들 대부분이 생활이 어려워 하루 먹고 살기에도 힘든데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쉼과 위로와 힘을 주고자 하는 것이 음악회의 취지였습니다. 그에 덧붙여 저로 하여금 음악 분야 전문인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심어 주고, 음악사역의 지경을 넓혀 보도록 하려는 남편의 또 다른 의도도 있었습니다. 음악회 프로그램 중에 저희 5인 가족의 리코더 연주, 전통악기와 피아노 협주, 그리고 틈틈이 시간을 내 배워둔 전통 현악기 ‘마두금’ 연주 등을 할 수 있어서 참으로 뿌듯했습니다.
저는 앞으로 현지 초·중·고등학교 음악전담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리코더 음악교육을 통해 크리스천 음악교사들을 일으키고, 나아가 교사 복음화를 이루어가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열매가 보이지 않고, 그 열매를 얻기까지 아무리 오랜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할지라도, 음악 분야 전문인 선교사로서의 길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 가정에 주신 세 자녀를 홈스쿨링을 통해 잘 양육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 자랑스러운 한국인, 창의력 있는 국제인으로 잘 자라나길 소망해 봅니다.
글/장사라 선교사
남편 최드림 선교사와 함께 GMF(한국해외선교회) 산하 HOPE(전문인협력기구) 선교사로 몽골에 파송되었으며, 과학기술·음악 분야의 크리스천 전문인 양성 및 배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자녀로 1남 2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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