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와 교리적 변질 - 이상규 교수
2018.08.07 14:27
교황 그레고리우스와 교리적 변질
이상규 교수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황제도의 기원과 발전
교회 역사를 세 시기 곧 초대, 중세, 근현대로 나누는 방식을 ‘삼분법’(三分法)이라고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초대와 중세의 분기점을 590년으로 본다. 물론 이것은 역사 공부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가설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해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우리나라가 언제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는가 하고 물으면 누구나 1945년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fact)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이 언제부터 근대화되었는가를 물으면 그 대답은 각기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느 때를 중세로 볼 것인가는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에 대답이 각기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중세의 시작을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을 받은 313년으로 보는가 하면, 니케아종교회의가 개최된 325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북유럽에서 온 종족들, 곧 동고트족(Goths), 서고트족(Visigoths), 반달족(Vandals) 그리고 프랑크족(Franks) 등 야만족들(barbarians)의 침략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했던 476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들은 590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590~604)가 교황이 되었는데, 이때로부터 이전 시대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교권의 시대를 엮어갔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교회 역사에서 최초로 ‘교황’(pope)으로 불린 이는 그레고리우스 1세였다. 로마 가톨릭은 사도 베드로가 제1대 교황이었다고 보고 그 이후의 로마 감독을 교황으로 간주하여 그레고리우스 1세를 제64대 교황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2세기 이후 서서히 대두된 교회관 변질로 나타난 인간 중심의 계급 구조였다. 신약성경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동의어였으나, 점차 이를 구별하여 장로보다 상위 다스림의 직분이 감독이라고 보았고, 감독 위에는 대감독이 있다고 보아 교회 직분을 계층 구조로 이해했다. 그 결과가 500여 년 후 교황직의 출현이다.
기독교가 313년 로마제국에서 공인을 받고 380년 국교가 되자 교권체제가 굳어졌고, 교회의 고위 성직자 곧 감독들은 세속 권력과 함께 공직자에 해당하는 편의와 혜택을 누리면서 황실과 국가행정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헨리 차드윅(Henry Chadwick)이라는 영국의 교회 사학자는 고위 성직자들이 로마제국 내의 “신흥계급으로 대두되었다”(a new type of leader in the community)고 평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그레고리우스 1세는 로마 가톨릭에서는 탁월한 교황으로 간주하는데, 고르디아누스와 실비아의 아들로 출생했다. 이미 펠릭스 3세(483~492)와 아가피토(535~536)라는 두 교황을 배출했던 유명한 가문 출신이었다. 일찍이 법률을 공부하고 공직자로 살았으나 부친의 사망 이후 수도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시실리아에 6개 수도원을 세워 묵상과 고행에 전념하며 라틴 교부들의 문헌과 성경을 연구했다. 지나친 고행으로 일생동안 위장병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후에는 부제가 되었고, 579년에는 교황 사절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우위권 경쟁으로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로마교회를 대표하여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외교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86년에는 로마로 돌아와 교황 펠라기우스 2세(Pelagius II)의 고문으로 교회 일을 관장했다.
그러던 중 589년 테베레강(이탈리아어로는 fiume Tevere, 라틴어로는 Tiberis라고 부른다. 이 강은 이탈리아 중부에서 로마시를 관통하여 티레니아해로 흘러들어 간다)의 범람으로 전염병에 감염되어 펠라기우스 2세가 590년 1월 사망했다. 6개월간 후임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만장일치로 그레고리우스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수도생활에 마음이 있던 그레고리우스는 교황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심지어는 위장을 하고 로마를 탈출하려 했으나 타의에 의해 590년 9월 3일 교황이 되었다.
그는 처음 자신을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서 종”(servus servorum Dei)이라고 말했을 만큼 겸손했으나, 후일 교황은 '신앙의 머리’(caput fidei)라는 이름으로 교황제도 혹은 교황권을 확립하고 절대 권력자가 되어 14년간 통치하고 604년 3월 12일 사망했다. 당시 교회는 그의 묘비에 ‘하나님의 집정관’(Consul of God)이라고 기록하여 그를 높이 평가하였고, 후일 ‘대 그레고리우스’(Gregory the Great)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레오 1세(Leo I, 440~461),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y VII, 1073~1085), 이노센티우스 3세(Innocent III, 1198~1216)와 더불어 교황제도에 가장 영향을 끼친 교황으로 알려져 있다. 또 그는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 아우구스티누스에 이어 ‘라틴 교부의 네 박사’(the four Doctors of the Latin Church)로 불리기도 한다.
교리적 변질
그레고리우스 1세는 유능한 행정가로서 교황령, 곧 바티칸시티(Vatican city)의 기초를 놓았고, 선교사를 파송하여 교황령을 넓혀 교세를 확장하기도 했다. 교회 음악에도 영향을 끼쳐 ‘그레고리안 찬트’가 중세교회 음악으로 정착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키리에 엘레이슨’(Kyrie, eleison,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과 ‘크리스테 엘레이슨’(Christe, eleison, 그리스도여 자비를 베푸소서)이 주된 성가 예식서가 되게 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잘못된 교리를 공표하여 교리적 변질을 가져왔다. 즉 세례 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고, 세례받은 후에 범한 죄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행해진 덕(德) 혹은 공로(功勞)로 사함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또 성자들도 우리의 중보가 될 수 있다고 보았고, 연옥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연옥은 교회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교황은 연옥의 영들을 해방시켜 천국으로 보낼 권한이 있다고 믿었기에 사자(死者)를 위한 기도와 사자들을 위한 헌금이 성행하게 되었다.
또 교직자의 독신제도를 주창하였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는 ‘교회의 교사’(Doctor ecclesiae)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천사나 소위 거룩한 것들의 중개자가 되었고, 연옥, 성골숭배, 이적과 기사, 이교적 미신 등을 도입한 인물로서 ‘미신의 아버지’(Pater superstitonum)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늘 우리가 볼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회가 로마의 오도된 교리(전통)에 빠지도록 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로부터 발전된 몇 가지 교리적 변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황권의 확립이다. 초대교회의 겸손한 섬김의 직분이 사라지고 인간적 다스림의 직분이 교황제도로 발전하였고, 교황은 지상권을 주장하고 세속왕으로 군림하기까지 했다.
둘째, 성만찬관의 변질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성만찬이 차츰 희생제사로 변질되었다. 처음에는 신체적 임재설(corporal presence)을 막연히 주장하였는데 831년에는 레드베르투스(Paschasius Radbertus)에 의해 화체설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게 된다. 이로부터 400년이 지난 1215년 라테란회의에서 화체설이 공식교리로 채용되었다.
셋째,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성자(聖者)들에게 하는 기도가 생겨났다. 성자와 순교자가 존경받게 되면서 점차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행해지고 성자에게 기도하는 습관이 대두되었다. 이것은 787년 제2차 니케아회의에서 공식 승인되었다.
넷째, 마리아 숭배사상(adoration of Mary)이 대두되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라고 하여 로마 가톨릭에서 모든 성자의 수반으로 이해한다. 이레네우스는 그를 ‘새 인간의 어머니’란 뜻으로 ‘the second eve’라고 하였고, 테르툴리아누스, 클레멘스는 금욕적 감정에서 마리아의 영원 동정녀설을 주장한 바 있다. 4세기 이후 기독론 논쟁에서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Theotokos, Mother of God, 이 용어는 431년 에베소회의에서 처음 쓰였고, 451년에 모인 칼케돈회의의 칼케돈신경에도 나타난다)로 인정되고 성자들의 으뜸이 되었다. 150년까지는 마리아를 우상화한 기록도 숭배한 기록도 없다. 그러나 후일 마리아에 대한 여러 전설이 유포되었다. 곧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313) 후 헬라·로마의 이교 숭배자의 영향으로 마리아의 상(像)이 나타났고, 5세기부터 마리아 숭배(Mary cult)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은 누가복음 1장 28절과 1장 42절에 근거하여 마리아 숭배를 주장했는데 중세시대 이 숭배가 더욱 심화되어 마리아 숭배를 위한 시와 노래가 생겨났으며, 아베 마리아(Ave Maria)도 그중의 하나였다. 마리아 숭배가 심화된 원인은 중세시대에 부인을 높이는 무사도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마리아는 정결하고 죄가 없는 성모(聖母)라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녀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정결하고 무죄했다는 소위 무죄수태설(無罪受胎說)을 믿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마리아 숭배는 이태리인 피터 다미안(Pietro Damian, 1007~1072)에 의해 고양되었는데, 그는 고행과 금욕을 힘썼으며 1058년에는 추기경이 되었던 사람이다. 후에는 마리아가 영원히 처녀였다는 마리아의 영원 동정녀설, 마리아도 승천했다는 소위 마리아의 승천설까지 나왔다.
다섯째, 비밀 고해(告解)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죄의 고백이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졌으나 레오 1세(Leo I, 440~461) 이후 신부(司祭) 앞에서 하는 개인적인 고백으로 변화되었다. 당시 고백은 허용되었으나 강요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703년 메쯔(Metz)감독에 의해 처음으로 강요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섯째, 사치스런 교회당과 성상숭배가 대두되었다. 돈 많은 그리스도인이 많아지자 집회장소를 화려하게 꾸미기 시작하였다. 그 예가 콘스탄티노플의 성소피아성당이었다. 또 그레고리우스 1세 당시 로마의 7대 교회가 그러했다. 이미 히에로니무스, 요한 크리소스톰 등은 교회의 사치를 경고했고, “참되고 거룩한 생활로 단장된 것만이 참된 성전”이라고 교회의 사치를 비판했으나 이런 풍조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814년 교회내의 성상숭배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했고 무슬림교도는 이를 우상숭배라고 비난했을 정도였다.
일곱째, 분향(incense)의식이 나타났다. 향을 태우는 일이 처음에는 건물을 훈증(燻蒸, fumigation)하기 위한 것이었다. 향불은 첫 4세기 동안은 예배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점차 예배의 한 요소로 등장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와 락탄티우스는 향을 피우는 의식과 관련하여 “이것은 이방인의 것이지 그리스도인의 의식일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으나(325년) 분향이 예배의 한 요소가 되었다.
이상에서 보는 바처럼 인간 중심의 고위 성직계급의 출현과 더불어 신약교회의 원리는 점차 변질되어 미신과 이교적 풍습이 교회에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이런 점이 중세시대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탈하게 했고, 결국 미신과 인간 중심주의가 대두되어 교리적 변질을 초래한 것이다.
글/이상규 교수
미국 Calvin College와 Associated Mennonite Biblical Seminary 방문교수, 호주 Macquarie University 초기기독교연구소 연구교수, 고신대학교 부총장을 역임. 현재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