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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아식에 즈음하여

우리 둘째 아이의 헌아식이 이번 주에 이루어질 예정이다.(저의 마음이기에 반말을 씁니다. 죄송합니다.)

처음에는 헌아식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예배 가운데 헌아식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소심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 잠시라도 신상이 알려지는 것이 무안하여 부담스러웠다.
쓸데없이 깔끔한 성격이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정신을 우리에게 한번이라도 쓰는 것이 그들에게 빚진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나름대로의 공공정의를 위해서는 우리 아이만 특별하다고 생각하여 특별대우를 받을 것을 기대하면 안될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믿음도 부족하고 교회에 기여한 것도 없이 받으려만 하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목사님과 회중들의 기도를 받고 잘 키울 것을 약속하고서 그대로 키우지 못할까봐 부담스러웠다.
아기 스스로가 과연 이 헌아식을 원할까 또 기억할까, 아니면 단지 부모가 마음의 안위를 얻기 위함이 아닐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헌아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부담스러움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볼 때 생각과 시각이 바뀌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그래서 헌아식은 부담스러움이 아니라 축복이고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 믿게 되었다.

아이를 하나님 앞에 인사드리고 축복을 받는 것은 아이를 위해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또 해야만 하는 가장 큰 선물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기와 가족이 소개되고 기도받는 것은 무안한 일이 아니라 감사한 일이다.
성도들은 숫자와 상관없이 가족, 공동체와 같은 것이기에 나를 숨기고 포장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는 특별함은 평등을 해치는 우열이 아니라, 서로가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기에 충분히 누려야 한다.
부모가 믿음이 없고 교회에 봉사하지 못했으면, 뻔뻔스럽지만 이를 계기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이 있고 무엇인가를 했기에 축복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감사와 감격은 없어지는 것이다.
아이에게 믿음에 대해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의 기회를 준다고 하는 것은 아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좋은 것을 빼앗는 부모의 월권이자 직무유기이고 어줍지 않은 인본주의이다(그렇게 아이에게 자유를 주려 하면서 왜 우리는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이 많을까? 이건 아전인수식 인본주의일 뿐이다).

내 중심으로부터 하나님 중심으로 시선이 바뀌고, 어른의 입장이 아닌 아이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무엇을 가치있게 여기느냐에 대한 축복의 의미는 달라질 것이다. 하나님 중심으로, 아이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무엇이 축복된 일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첫아이의 헌아식은 첫아이라는 설레임과 기대에 들떠 단순한 마음에 받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둘째는 둘째라서 또 첫째와 같은 성별이라서 뭔가를 안다고 하는 교만함과 떨어진 기운에 그냥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하였다. 하지만 그러기엔 둘째에게 너무 미안하였다. 오히려 더 열의를 내야 할 것 같았다. 아기를 갖고 태교를 하면서 기도했던 것들을 앞으로도 지켜나갈 힘이 필요하였다.

시간을 가로질러 역사를 통찰하고, 공간을 가로질러 세계를 품도록,
자신이 가진 조건과 환경에 충실하되 그것을 뛰어넘도록,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창조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도록,
이성과 감성과 의지를 모두 동원하여 살아가도록
선하고 아름답고 바르고 지혜롭고 용감하도록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하도록

이렇게 인간적으로 뛰어나면서 균형되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그것 위에 아니 그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자신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도록

보잘 것 없는 우리 그대로를 믿어주시는 하나님을 믿도록

그렇게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헌아식에 즈음하여 떨리고 죄송한 마음으로 우리 부부의 다짐을 한번 적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