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소금] 교양인을 넘어서라
2004.11.13 13:02
교양인을 넘어서라
영적 지도력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타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르게 하는 인격과 사역의 총합"이라고 정의를 내려본다. 교회지도력 전문가인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리더는 길을 알고, 그 길을 가며, 그 길을 보여준다!(A LEADER KNOWS THE WAY, GOES THE WAY & SHOWS THE WAY)로 보았다. 그렇다면 세상의 리더와 교회의 리더의 차이는 무엇인가?
적어도 신앙인은 교양인의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교회는 교양인이 많은 교회이기 이전에 신앙인이 많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신앙인은 반드시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양인이 반드시 신앙인이란 보장은 없다. 교회는 신앙인을 배출해내는 믿음의 현장이다. 만약 교회가 성경적 신앙인을 훈련하여 지도자로 세우는데 둔감하다면 교회내의 영적 혼란은 불 보듯 한다.
민수기 13장은 교양인과 신앙인에 대한 통찰력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바란광야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된다. 정탐을 시킨 분은 하나님이셨다. 주님께서는 각 지파중에서 족장된 자(Leader) 한 사람씩을 선택하여 파송할 것을 명하셨다. 우리가 아는대로 여호수아와 갈렙을 포함한 열두명이 임무를 띠고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샅샅이 살피게 된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임무를 맡긴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스라엘 자손의 두령된 사람(Head of the sons of Israel)"이었다. 족장 된 자며 두령된 사람이었던 그 시대의 엘리트들은 가나안을 분석하며 평가하는데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들의 보고는 짜임새 있었으며 백성들에게 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했다.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영향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된 그들의 보고는 온 이스라엘 백성의 간담을 서늘케하고 급기야 영적 공황의 현상을 몰고 왔다. 바로 준비되었다고 선택된 백성의 지도자는 그들의 지식을 앞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였다. 이로 보건대 지도자의 타락은 온 백성과 공동체의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된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사람, 남겨두신 그루터기 같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 무너진 백성의 마음을 새롭게 하셨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신앙공동체의 인도자 곧 교회의 지도자는 적어도 교양인을 넘어서야 한다는 추상같은 진리이다.
검증된 지도자로 서라
왜 한국교회가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가? 왜 지역교회가 자생능력이 부족한가? 왜 사회전문인 집단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삐딱한가?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으나 대답은 한가지로 귀결된다. "교회의 지도자가 검증된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앙인 지도자 부재 때문이다. 누구든 부유하다는 사실이, 지식의 높음이, 그의 지위가 교회의 지도력으로 바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사회 엘리트에 대한 선호가 교회지도자에 대한 자연스런 자리매김으로 연결되어서는 안된다. 마치 영혼이 거듭나야 하는 것처럼, 교회 지도력에 대한 시각은 거듭나야 한다. 일제시대 친일에 물든 자가 해방 후에 버젓이 민족의 지도자로 등장한 사실은 두고두고 우리민족의 아픔이 되었다. 식민사관이 아니라 민족사관으로 검증된 지도자를 세우지 못함이 역사발전의 발목을 잡은 셈이 되었다. 교회 역시 동일한 원리를 지닌다.
돈 많이 가졌다고, 남보다 더 많이 배웠다고, 권세와 지위가 남보다 뛰어나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을 덥썩 교회지도자로 세울 때의 폐해가 얼마나 막심한가는 체험을 통해서 안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직전에 유수한 대학교 기획정보처장을 만나고 왔다. 기독교수 사회의 고민은 의외로 심각하다. 신앙인으로는 부적격한 자가 교수라는 사실 때문에 버젓하게 교회의 리더십으로 자리잡고 있는 예가 누가 적다고 할 수 있을까? 교수로서 그의 지성은 검증되었을지 몰라도 과연 신앙인으로서 인정받고 있는가? 믿음의 고백과 주님사랑의 고백을 통하여 검증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교회지도자로 서게 되는 "교회지도자 세우는 과정"의 구조적인 문제를 직시함이 필요하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코너로 몰아 내는 현상은 교회의 부실한 검증시스템의 악한 열매이다. 반듯하게 살고자 하는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크리스천들의 적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카멜레온처럼 주님과 세상에 양다리 걸치고 예수 믿는 아군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교회지도자의 체질이 신앙인답게 거듭나지 않고서는 교회는 이 세상에 빛을 더 이상 비출 수 없다.
가면을 벗어라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약간의 가면을 쓰게 마련이다. 개인적인 일로 가면을 쓰게되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교회의 공식적인 리더십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이가 철저하게 베일에 가리듯 숨겨져 있으면 문제가 달라진다. 교회 지도자는 세움 받기 전에 "가면을 벗을 축복된 기회"를 가져야 한다.
가면을 벗는 작업은 목적이 분명한 소그룹에 참여함으로 가능하다. 삶을 발가벗겨 놓을수록 치유는 쉬워진다. 철저하게 차단되고 숨겨진 상처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한국전통의 유교의 폐단인 허례허식주의, 체면주의가 교회안에 물밀 듯 들어와 신 바리새주의를 낳았다.
자연스럽지 못한 목소리, 짐짓 표정, 의도된 걸음걸이, 젠체하는 타성, 교회서류 결재하는 것을 섬김의 표현이 아니라 권위의 표지라고 생각하는 어그러진 사고방식은 훈련과정을 건너 뛴 데서 오는 폐단이다.
소그룹은 따뜻한 신앙동지애를 제공한다. 준비된 말씀의 나눔을 통하여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경험을 반복하면 고압적인 자세는 누그러져 온유함으로 대체된다. 진실을 추구하는 참여자는 준비된 만남과 사건을 통해 열린 공동체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무장된다. 소그룹을 통하여 상대를 배려하는 덕을 쌓는다. 열린 상호 인간관계(interpersonal Relationship)의 역동적인 만남은 가면 쓴 인간을 바꾸어 놓는다. 사람들 사이에서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사람들을 이끌 수 있단 말인가?
다니엘은 혼자가 아니었다. 비전을 공유한 살가운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 복음주의 노선에서 목회자와 평신도 리더십의 전면에서 향도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세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꿈을 가진 소그룹의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이들이다. 마음이 찡 하도록 용납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타인에 대하여 너그러울 수 있다. 동료들의 따뜻한 섬김의 손길을 자주 경험할수록 인간 불신과 미움의 쓴 뿌리는 뽑혀진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소그룹에서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심령의 독기가 빠진다.
한국전역에서 지역교회 리더십의 거대한 변화가 가속도를 띠기 시작했다. 겉꾸밈보다 속 알찬 세대로 전환하는 시대적 흐름을 거스릴 수 없으리라.
시대의 대안으로 서라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거나, 이번처럼 새정부의 장차관의 인사가 끝난 후에는 의례 등장하는 기사가 있다. 예수 믿는 국회의원과 장관의 수가 전체 몇 퍼센트인가에 대한 기사이다. 인물 프로필을 접할 때마다 솟아오르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이렇게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도처에 포진하고 있는데 그 간단한 "교회 재산 보존법"하나 통과시키지 못하는가?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무원들로부터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장차관, 청장 재직시에 예수 믿는 사실하나를 똑 부러지게 알리는 사람 귀하다는 말이다. 어디 정치인만 그러한가. 사업하는 이는 현장에서 사무실을 관장하든지, 회사 전체를 경영하든지 예수 믿는 냄새 맡기 힘들다는 자조적인 탄식이다. 예외는 있겠지만 크리스천으로서 가슴을 칠일이다. 문제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리더가 아니다. 진짜 예수장이이다.
영혼은 구원받아도 자기정체성이 희미하면 믿음을 삶으로 연결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교회안이나 교회 밖이나 같다. 상식인, 교양인의 수준에서 한 발짝도 떼어놓지 않으려는 교회지도자들에게는 새로운 가나안은 없다. 윤리적 차원을 벗어나, 믿음의 차원까지 승화되어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인식이 분명한 리더만이 또 다른 신앙인으로 이끌 수 있다.
교회정체 위기의 극복은 직분자들이 자신을 교양인으로 묶어두면서도 "썩 괜찮은 자신"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남에 있다. 자신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식하고 제자됨을 위하여 부단히 채찍질하는 장로, 권사, 집사 직분자는 그가 속한 교회의 희망이다.
미디안을 대항한 이스라엘 군사는 이만 이천명의 두려워서 떠는 자들이 아니었다. 교양인을 넘어서는 신앙으로 무장된 삼백명의 용사였다. 새시대의 변화의 주체로 쓰임 받는 새로운 삼백용사가 한반도 처처에서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어느 시대이건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사람에게서 찾았다.
우리시대의 대안은 믿음의 사람이다.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하늘의 비전을 가슴에 담은 사람이다. 지역교회에 소속되어 섬기지만 한국교회를 품고 기도하는 사람이다.
이끎으로 섬기고(Serving by Leading) 섬김으로 이끄는 (Leading by Serving) 균형 잡힌 교회 지도자이다. 지역교회의 영적 풍향은 예수님을 닮은 섬김의 지도력(Servant Leadership)을 소유한 이들의 가슴과 무릎 그리고 손발을 통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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