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목회] 건강한 교회의 견인차로 서는 사모
2004.11.13 13:04
월간목회 2004. 9
오정호 목사
건강한 교회의 견인차로 서는 사모
사모의 삶의 질(Quality of Life)은 사모의 영성(Spirituality)에 놓여 있다. 방언하고, 예언하고, 치유사역으로 대변되는 그러한 종류의 영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닮은꼴(Christlikeness)로서의 영성을 의미한다. 영성의 핵심은 인격적인 관계이다. 영성의 모델은 요한복음 21장에 나타나는 관계의 영성이다. 물론 관계의 영성의 핵심은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애제자 베드로에게 묻고 싶으신 것, 확인하고 싶으신 것, 다짐받고 싶으신 것은 사랑의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의 관계를 다짐 받고나서 그 후에 사역에 대하여 친히 말씀하셨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의 질문확인 후에 비로소 주님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말씀하셨다. 사랑이 사역보다 앞선다. 동기가 결과를 이끈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학력이나 경력, 외모나 소유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 곧 사랑으로 표현되는 관계이다. 사모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된 사역자이다. 사역자에게는 사역으로의 부르심이 전제가 된다. 남편목회자의 배우자나 동반자 수준에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동역자로서의 자질이 사모에게 요구된다. 건강한 교회는 목회자의 이끄는 사역과 사모의 희생적인 사역위에 세워진다.
1. 영적흡인력 있는 사모
한국교회에 고래로 내려오는 말 중에 "장모 잘 만나면 목회 성공한다"는 말이 있다. 장모사랑은 사위사랑을 의미하기에 대단히 인상적인 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조금더 생각해 보면 장모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은 존재가 누구이겠는가? 당연히 딸이다. 특히 사모의 소명을 받은 딸임에 더할 말이 있을까? 기도하는 장모에게서 기도하는 사모가 나지 않겠는가? 요즘 공부 많이 한 사모, 지도력 있는 사모, 만능 스포츠우먼 사모, 사회활동에 능한 사모가 흘러 넘치고 있다. 그러나 목회의 본질이 남편 목사의 영성에 걸려있고 사모 또한 그 책임에서 면제되지 않으리라.
영적흡인력은 주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의 역동성에서 생겨난다. 성도들이 기대하는 사모의
궁극적인 모습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모습이다. 사모의 주님과의 살아있는 관계가 삶으로 나타나 열매 맺으면 열매의 수혜자는 사모자신은 물론 남편 목회자와 온가족 나아가서는 온 교우들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기도생활과 말씀생활의 양대기둥을 기초로 하여 봉사와 전도 그리고 섬김으로 단단히 자리매김하는 사모의 영성은 온 교회의 기쁨의 빛이 된다. 기억하라. 컴퓨터에 출현 훨씬 이전에도 교우들은 사모의 영성을 기대하였다. 더욱이 컴퓨터시대에는 영성에 대한 갈급함이 뭇 영혼에 배어있다. 이런 이유로 교인들은 영성이 충만한 모델로서의 사모를 갈구하게 된다. 영적으로 흡인력이 있는 사모가 되지 않으면, 돠연 어떤 사모상을 제시해야 성도들이 기뻐하겠는가?
목사의 직분이 직업화, 세속화, 문화화되면서부터 목회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동일한 원리로 사모의 영광스런 직분이 소명없이 이루어져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면, 어느정도 성도들의 영적 갈급함을 메꿀 수 있을까 의문이다. 교회가 존속하는 한, 사모의 직분이 존속하는 한, 영성충만한 사모, 영적흡인력이 있는 사모상에 대한 요구는 증가되리라.
2. 가정경영전문가로서의 사모
헨리나우웬(Henri Nauwen)은 우리시대의 특징을 내향성(Inwardness)과 아버지상실(Fatherlessness)그리고 강박성(Convulsiveness)으로 규정하였다. 다른말로 이해하면 너도 없고, 기성세대도 부인하고, 방항하는 세대라는 의미이다. 원론적인 표현이지만 하나님께서 설립하신 신적기관으로서의 양대기관은 교회와 가정이다. 교회와 가정의 경영원리는 같다. 이미 "가정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정"이라는 말이 한국교회에 익숙하게 되었다. 교회경영과 가정경영은 상생의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목회자를 교회경영 전문가로 이해한다면, 사모는 가정경영의 전문가로서의 소양과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이 시대의 특징이 가정해체현상으로 나타날 때 목회자의 가정도 예외가 아니다. 교인들의 가정이 흔들리고서야 어찌 평신도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하물며 교역자의 가정이 흔들려서야 목회가 온전 할 수 있겠는가! 경직된 사모의 모습으로는 더 이상 가정의 하나됨을 지켜낼 수 없다. 유연한 사고와 반응의 탁월한 선택을 통하여 목회자의 가정은 세속의 도전과 유혹하는 세대에서 생존(Survival)할 수 있다. 살아남아야, 부흥(Revival)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 가치관의 압력은 목사관이라 해서 봐주는 법이 없다. 목회자 자녀들 가운데 빗나갈수 있는 개연성은 항상 있다. 자녀교육의 탁월성을 통하여 목회에 덕(?)을 보는 경우만 있다면 얼마나 감사할까? 그러나 현실은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다. 공교육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사교육이라도 마음껏 활용하고 싶지만 목회자의 가정형편은 어림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이다. 목회자 대다수의 가정은 냉엄한 교육현장에 내 팽개쳐진다. 모든 목회자의 사모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자녀교육에 좀더 지혜롭고, 전략적인 사모가 되어 달라는 주문이다.
전통적인 사모상은 목회에 간섭하지 않고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뒤에서 희생적으로 숨어 봉사하는 사모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오히려 순발력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모의 모습이 요구된다.
남편 목회자의 아내로서의 가정경영은 남편경영과도 일맥상통한다.
성적인 유혹이 온 사회를 진동시키는 현실을 직시하고 남편을 내조하는 방법과 강도를 조절하는 탁월성 있는 사모상이 요구된다. 강단위에 설 때는 설교자와 목회자로서의 남편이지만. 집안에서는 한 남성으로서의 남편으로 맞아드리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스캔들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건전한 가족문화가 꽃 피어야 한다. 건전한 가족문화의 중심에는 영적으로 투명한 남편과 아내, 성적으로도 상호 열려있는 부부상을 세워가야 한다. 사모의 기도제목이 좀더 실제적일 필요가 있다. 피상적인 기도 "남편의 영육간의 강건함을 주옵소서"도 좋지만 "남편이 목회에도 내면세계의 만족함이 넘치게 하시고, 성적으로도 만족하여 모든 유혹의 장애물들을 능히 뛰어넘게 하옵소서. 센스 있는 사모로 스스로 영성과 지성 그리고 관계성을 연구개발하는 일에 진보가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고 목표가 분명한 기도와 실천의 장으로 나아가야 하리라.
3. 탁월한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사모
한때 일방적인 의사소통시대가 있었다(One way Communication)그 이후 쌍방통행의 시대가 왔다(Two way) 지금은 다중 복합 커뮤니케이션시대이다(Multi Communication)
혈관이 막히면 피부가 썪는다. 변질된다. 순환에 장애가 있으면 몸의 기능이 떨어져 급기야 죽음에까지 이른다. 교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소통과 순환에 장애가 없어야 한다.
흐름이 막히면 문제가 발생한다. 탁월한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사모는 어떤 보습일까?
잘 듣고, 잘 말하는 기능을 잘 수행하는 사모이다.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중에 사모와 관련된 많은 문제가 말 즉 입술의 사역 때문이다. 정말 지혜 없는 말 한마디 때문에 얼마나 많은 목회현장이 흔들리고 있는가? 말 한마디가 화근이 되어 도저히 수습 불가능 할 정도로 목회가 추락하는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최근 대통령의 말이 구설수에 자주 오르기에 덩달아 언어생활에 대한 책이 눈에 띄게 많이 출판되었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나라 전반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친다. 사모의 말 한마디가 남편의 심장은 물론 교우들의 마음까지 감동을 끼치든지, 아니면 폭탄의 뇌관을 건드리는 것처럼 폭발시키기도 한다. 무릇 사모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수준의 커뮤니케이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상이라야 한다. 문제 있는 곳에 가거나, 사람을 만나서 문제를 잠재울 뿐 아니라 오히려 감동을 끼쳐야 하리라. 탁월한 커뮤니케이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그룹활동을 통하여 상대의 말에 무게를 두어 잘 듣는 단계(경청의 단계)로부터 시작하여 잘 말하는 단계(전달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런 관정을 통하여 생산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사람을 얻는 단계). 자수성가형 사모나 목사는 때때로 대화의 미숙함을 보인다. 협력적 관계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소그룹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정서적인 교감과 심리적인 상호교류의 경험이 커뮤니케이터로서의 놀라운 자산이 된다. 한국교회 사모들 가운데 속병이 든 사람중에 말못하여 응어리진 사연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두다가 어느 시점에 질병의 수준까지 발전한 예가 적지 않다.
전제군주적인 목회자는 의사소통이라는 과정이 없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흡사하게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확신하는 목회자나 사모들 가운데서도 의외로 대화의 기본기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예를 많이 본다.
그들의 의식의 심층부에는 인간상호간의 대화나 의사소통은 필요악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신약교회의 특징은 서로 가르치고, 화답하고, 권면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공동체이다(골3:16) 탁월한 커뮤니케이터는 훈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대화나 협력 그리고 연구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복되게 하신다(행15장의 예루살렘회의)우리주님 자신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탁월한 커뮤니케이터의 역할 모범(Role Model)그 자체이셨다.
우리시대는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은 위대한 의사소통자 제2의 아비가일을 부르고 있다(삼상25장)
4. 문화개혁자로서의 사모
역대상 12장에는 다윗 왕국이 세워질 때 다윗을 옹립한 군사들의 면면이 소개되어 있다.
그중 잇사갈 자손을 소개하는 내용 중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은 "시세(時勢)를 알았다. Know the Times"곧 시대의 정신과 흐름을 읽어내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뜻이 사울에게서 다윗으로 옮겨진 거룩한 뜻을 인지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디모데를 교훈하면서 시대정신을 간파 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딤후3장).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정신을 문화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다. 시대마다 정신이 다르다. 문화가 상이하다. 유행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어디 시대 뿐이겠는가 가정마다, 교회마다, 문화가 다르다. 코드가 같지 않다.
대도시와 중소도시 그리고 시골이 같을 수 있겠는가? 개척교회와 제법 역사가 쌓인 교회는 그 문화가 제 각기 독특하다. 중요한 것은 문화의 다양성이 아니다.
그 문화 가운데 비복음적인 요소는 약화시켜 제거하고, 복음적인 요소는 강화시켜 드러내야 한다. 문화를 성경적인 원리로써 읽어내는 눈이 약하면, 문화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
많은 교회에서 문화적인 요소를 복음적인 요소라고 오해하여, 묵인함으로 교회의 생명의 역동성이 약화되고 있다. 그레셤의 이론대로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원리는 문화와 복음과의 관계에서도 발생한다. 문화가 복음을 몰아부쳐 약화시키는 현상은 비극이다. 복음이 문화를 이끌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모이다.
문화개혁자로서의 안목을 지닌 사모는 무관의 제왕으로서 교회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사모가 늘 주님과 역사로부터 배우려는 자세(Teachable Attitude)를 견지하면 복음이 문화를 이끌도록 하는 사역에 놀랍게 쓰임 받을 수 있다.
일반적인 변화의 단계는 ①지적인 변화(정보취득) ②태도의 변화(확신)/ 태도가 사실보다 훨씬 중요하다(Attitude is more important than fact by karl menninger) ③ 새로운 행동양식으로의 변화(순종 및 실천) ④공동체(가족, 교회, 사회, 국가)변화로의 확산(네트워킹)
이 네 가지의 변화의 동인은 "주님사랑, 교회사랑, 영혼사랑"이다. 이 역할을 가장 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목회자 외에 사모밖에 더 있겠는가? 우리시대의 사모의 심령에 변화의 동력으로 주님의 안수하심이 있기를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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