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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은 인간은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흘러온 인간의 역사가 이 사실을 밝히 보여주고 있다. 지혜자와 우매자의 차이는 역사로부터 배우는가, 아닌가의 차이에 있다.  배우지 않으니 오죽하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제가 나왔을까? 개인의 삶이나, 공동체의 삶이나 동일하게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배우지 않음에 기초한다. 피아노 강철끈 보다 더 질긴 것이 인간의 고집과 편견인가보다. 낙하산줄보다 더 질긴 것이 인간 내면의 끓어오르는 욕심인가보다. 인간의 어리석음의 깊이는 저 우주의 블랙홀과도 족히 비교할 수 없는가보다.

필자의 목양실에는 제법 큰 사진 한 장이 유리액자에 고이 넣어져 벽 한 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 사진은 국제제자훈련원개원 예배 후 테이프 컷팅하는 장면이다. 원장이신 사랑의교회 원로 옥한흠 목사님 내외분과 혈육이요 비전의 동역자인 오정현 목사 내외 그리고 왼쪽 끝에는 별세신학의 주창자 이중표 목사님께서 자리하고 계신다.
필자는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언젠가 국제제자훈련원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디싸이플”에 사진이 실린 것을 보고 요청하였더니 보내준 것을 계기로 그 이후 계속 그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사진을 볼 때마다 목회의 멘토이신 옥한흠 목사님 내외분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사모함의 마음이 어우러진다. 형님 가족을 볼 때 우리 형제를 향한 주님의 높으신 소명을 느끼며, 형님의 사역위에 주님의 은총의 손길이 늘 동행하시기를 소원한다.

그런데 지난 7월 7일 사진의 대칭 구조를 이루어 서 계시던 이중표 목사님께서 홀연히 하나님나라로 떠나셨다. 평소 말씀 하신대로 별세(別世)하신 것이다. 필자는 교단이 다르기도 하고, 고인께서 이끄셨던 소문난 목회자세미나에도 한번 참석해 본 일이 없다. 그럼에도 평소보여 주신 그분의 순교자적 영성과 담백한 삶의 흔적 그리고 죽음신학에 대한 깊은 묵상의 글을 잊을 수 없다. 일간지에 실린 별세소식을 접하자마자 안내된 인터넷 조문사이트를 찾아 추모의 글을 남겼다. 사이트에서 200자로 제한했기에 짧게 실었지만, 처음에는 짧지 아니하였다.


이 / 이렇듯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시기 위하여,
중 / 중환 가운데서도 치열하게 사셔서 별세신학을 친히 이루셨네
표 / 표리일체의 삶으로 성도들의 존경을 받으며
목 / 목회자의 정도를 고고하게 걸으셨네
사 / 사모하는 눈물로 이별하는 성도들을 어찌 두고 떠나시렵니까?
님 / 님이시여, 한국교회의 님이시여!
     사랑의 주님 품에서 영원히 별세의 은혜를 누리소서.

지난 7월20일자 기독신문 1면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어떤 노회에서 어떤 교회를 영입하여 감사예배를 드린 후 찍은 사진이다. 여러 사람이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미소짓고 있는 모습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떠나는 날이 있다.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 존재는 아무도 없다. 나라는 존재를 주님의 은혜의 존재되게 하는 것은 지혜이다. 지혜는 배움에서 나온다. 주님과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삶을 의미 있게 경영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배우지 않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세포들이 내 영혼에 검버섯처럼 피어오를까 두렵다.

필자는 내 방에 있는 사진과 기독신문 1면에 실린 사진을 생각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는 목회자가 되지는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