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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조직의 결정적인 순간은,
고민하고 준비한 자에게만 포착되고 사용된다.”
는 명제가 다시한번 전광석화처럼 내 영혼에 파고들었다.


필자의 지난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렸던 우리교단의 90회 총회를 압축하여 정리한 한 문장이다. 금번 총회와 더불어 필자의 삶의 궤적에 스쳐지나간 수많은 생각, 만남, 유인물, 슬로건, 함성, 토론, 긴장, 발언, 기도, 눈물, 분노, 인내, 하필 나인가, 격려, 우려, 황송함, 어이없음, 도전, 열정, 네트워킹을 한 두마디의 말이나 A4용지 한 두장으로 메꿀 일이 아님을 안다. 필자는 총신대학 신대원 출신임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긍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러한 자긍심의 발현을 일단 멈추어야 할 때가 있었다. 후배 원우들의  총회 장소에 집결하여 그 가을의 뙤약볕 아래에서 얼굴이 새까맣게 타 들어가도록 구호를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선배라고 하는 신분 자체가 미안하였다. 후배들이 교실을 뛰쳐나오도록 한 현실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를 속으로 물으면서 선배로서의 한없는 자괴감을 가졌다. 필자는 금번 총회에서 원우들과 교수진에서 합세하여 총회를 세운 일을 선배와 동역자로서 크게 고맙게 생각한다.
교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원우들이 순수한 열정과 헌신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고 있지만 모든 일의 자초지종을 아는 필자로서는 무엇이 흑인지 무엇이 백인지 알고 있다.
원우들이 올 가을에 보여준 자기희생적 시위와 결의는 총신선배로서 총대로 참석한 우리 총회의 총대들에게 지울 수 없는 감동과 한탄을 동시에 각인시켰다.

삶을 던져서 배운 것만이 확실히 자신의 것이 된다.


카이로스 모먼트(Kairos Moment)!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일하시는 결정적인 시간은 오직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고 그 일을 위하여 몸을 던지는 이들에게 열려있다. 필자는 금번 총회기간 내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인간의 순종, 인간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침묵해야 할 때와 입을 벌려야 할 때,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야 할 때와 일어서야 할 때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해답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매어 달렸다. 분명한 것은 느리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붙잡고 돌리시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여전히 돌아간다고 하는 사실이다.
삶을 던져서 배운 것만이 확실히 자신의 것이 된다.
금번 총회기간에 후배들이 경험한 실천신학이 한 생애를 통하여 그 균형감각과 통찰력을 높이는데 살아있는 불쏘시개로 작용하기를 소원해본다. 꼭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상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옴니포텐트(Omnipotent/全能)하시고, 옴니프레전트(Omnipresent/遍在)하시며 또한 옴니션트(Omniscient/全知)하신 주님께서 사진 찍어 두셨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의 삶은 책상의 신학에 충실해야 하지만, 때때로 현장 속에 뛰어 들어 온 몸으로 체험하는 살아 있는 현장의 신학에 몸을 던질 때도 있다. 푸른 초장에서의 신학이 있다면 백두대간을 타는 신학도 있으리라. 신실한 주의 종들은 모세처럼 궁전신학과 광야의 신학을 균형 있게 체험한 흔적을 가지고 있다.
성총회(聖總會)는 입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고백과 순종을 담보하고 지켜내는 것이다. 신대원과 신학원의 신뢰할만한 전통은 총신 구성원인 교수와 학생들의 개인적인 소명감과 공동체적인 섭리적 만남에 대한 확신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몸으로 써내려가겠다는 불타는 의지에 의하여 세워진다. 개인이나 공동체에는 결정적 순간이 도래하기 마련이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신앙과 불신앙, 순종과 불순종, 이타와 이기, 주님과 맘몬 중에서 어느편에 서는가에 따라 인생과 공동체의 미래의 역사는 써지게 마련이다.
“결정적 순간에 그대는 어디에 있었는가?”
“결정적 순간에 그대는 어디에 설 것인가?”
추수의 계절에 우리가 경험하는 풍성한 열매가 있기까지 보이지 않는 파종과 성장의 치열한 몸짓이 얼마나 많았겠는가를 생각해 본다.
자연만물도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한다면, 주의 종들이 가야할 길은 자명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