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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하신 주 예수님의 성탄의 은총이 온누리에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모든 목회자들과 교우들께 속사람의 강건함과 삶의 활력이 회복되는 계절이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 살기를 원합니다. 여기에서 잘 산다는 말은 풍요롭게 산다는 의미라기보다 반듯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20,000 소득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습니다. 아마 $20,000소득이 완성되면 또 다른 국민소득의 목표를 세워놓고 달려가겠지요.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질주하는 트럭처럼!

왜 예수 믿는 사람이 반듯하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삶의 교훈을 받을 뿐 아니라 삶의 모습까지도 받습니다. 진정 역사이래 지구촌을 밟은 사람들가운데서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일하게 예수님은 잘 사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잘 사셨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한복음 17:4)” 하나님께 영광돌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단 한순간도 허투루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제멋대로 산다는 것은 자기됨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다는 의미이지 않겠습니까?

둘째 이유는 삶이란 한정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두 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한번 살 뿐입니다. 일생(一生)은 한 번의 기회를 의미합니다. 맛보기나 보너스는 없습니다. 우리의 한 번의 삶으로 우리의 영원한 미래가 결정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천국의 은혜를 맛보며 사는 것이 우리 자신일지라도 우리는 치열하게 기회를 붙잡으면서 살아야합니다. 영혼이 깨어있음과 기회의 선용은 항상 서로 만나 악수합니다. 예외없이 모든 이들의 삶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셋째 이유는 세상이 너무 어둡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 서야 할지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기준이 필요합니다. 원리가 필요합니다. 모범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직접 예수님을 보기가 불가능합니다. 단지 예수 믿는 사람을 볼 뿐입니다. 만약 예수 믿는 사람이 빛으로 나타나지 못한다면 그의 존재이유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상대주의적인 가치관 가운데서 절대주의 가치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침묵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빛을 비추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여전히 어두움에 묻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이유는 우리의 다음세대를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널리 알려진 교육학의 명제중의 하나가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의 “말”을 본 받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본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말로써, 원리로써, 이론으로써, 우리의 자녀들과 다음 세대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론전수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삶의 전수입니다. 우리의 다음세대의 깨어 있음을 위하여 먼저 보여 주어야 할 것을 반듯하게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삶으로 배어나오는 고상한 원칙이야말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교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섯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격려와 축복이 되어야 한다는 절실감입니다.
고장난 나침반처럼 제 멋대로 돌아가는 사회가운데서 정말 뜻을 세워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우리는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훈련의 미숙과 인격의 부적합성 때문에 빚어지는 일상사에 초라한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격려와 축복 그리고 용납과 환호가 필요합니다.
마치 그라운드를 들어오는 마라톤 선수에게 스탠드의 청중이 환호하는 것처럼 동일한 목적과 방향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치는 신앙의 동지들의 상호 격려는 목마른자에게 생명수와 같을 것이 분명합니다.

한가지 더 첨가한다면 우리가 반듯하게 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각자는 지역교회(Local Church)에 속한 교인이기 때문입니다.
각 지역 교회는 그 지역주민으로부터 주목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주목받는다는 사실이, 그리고 기대 받는다는 사실이 부담스럽지요. 이제 우리의 선택은 한가지뿐입니다. 삶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반듯하고 차원 높은 삶으로 우리를 내어 놓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 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잘 살도록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