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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는 계속되어야 한다


오십대 중반의 여성이 전혀 예기치 않은 급성 혈액암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온 가족이 비상에 걸렸다. 급격하게 떨어진 수치를 본 관계자들은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러나, 그 여성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온 교우들이 한마음으로 회복을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병자는 몸이 점점 가라앉고 의식도 왔다 갔다 했다. 희망의 등불은 꺼져가는 듯하였다. 그런데 가족들과 선한 이웃의 사랑과 관심은 더욱 강력하게 일어났다. 환자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혈소판을 기증하여 꺼져가는 등불 같은 그 환자의 몸에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몸이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환자 자신은 물론 병원 관계자들이 깜짝 놀랐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나눔의 기적, 사랑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병상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삶을 정리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유언을 가족에게 했던 그 환우는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마음속에는 예전에 없었던 삶의 희열과 감동을 가득 안고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가게 되었다. 한때 마음의 사형선고를 받은 그 환우는 이제 잔치하는 마음으로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며 산다. 인생의 위기 때문에 자칫 곤두박질 할 뻔한 삶에서 돌이켜 감사의 마음으로 나머지 인생을 살게 되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잔치하는 사람과 잔치가 끝난 사람이다. 매일 어깨를 마주하는 사람들이라도 그 경험의 세계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생존게임(Survival)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삶에 잔치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와 반하여 자신의 삶을 부흥과 축복게임(Revival)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 삶 속에서 청아한 음악소리가 들려나올 것이다.

사람은 자기에게 학습되어있는 안경을 끼고 자신과 이웃을 바라본다. 이 안경을 가리켜 가치관, 인생관 혹은 세계관이라 말한다. 그리고 각각 자신의 소견을 따라 살아간다.

잔치하는 사람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다.

첫째, 신뢰이다. 잔치하는 사람은 자신을 신뢰한다. 이 말을 이기주의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건강한 자존감(Self Esteem)이 높은 사람일수록 자신을 긍정한다. 자기 부정은 자기학대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도 비생산적으로 흐른다. 우리는 자신과 이웃에 대한 긍정의 힘인 치유와 회복을 택할 것인가, 혹은 부정의 힘인 냉소와 파괴를 안고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신뢰는 생명이다. 부부사이에 신뢰에 금이 가면 가정이 무너져 내린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무한 가능성을 열어놓지만, 불신앙은 그 입에 모래를 씹는 것처럼 악화될 것이다. 잔치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상호신뢰의 사람으로 서자.


둘째는 사랑이다. 사람은 예외없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 부모와 형제 사랑은 혈연적 사랑이다. 연인과의 사랑은 이성적 사랑이다. 친구들과의 사랑은 우정적 사랑이다. 열심히 다니는 직장을 위한 사랑과 혈연공동체인 우리나라에 대한 사랑은 언약적 사랑, 사명적 사랑이다. 사람은 또한 사랑 주기 위하여 태어났다. 사랑이 감사를 낳는다. 사랑이 기쁨의 원천이 된다. 사랑은 만물과 만인을 새롭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마귀의 세계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 받고, 사랑 주는 사람은 잔치하는 사람이다.

셋째는 희망이다. 형편이 남보다 낫다고 반드시 행복지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형편으로 말하면 에델 듀퐁(Ethel duPont)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그녀는 좋은 조건을 다 가진 여인이었다. 출생부터가 달랐다. 세계적 기업 듀퐁사의 장녀로 태어났다. 재산이 헤아릴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녀의 용모는 가는 곳마다 뭇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게다가 대통령의 아들과 결혼까지 했다.
이런 남다른 환경속에 있던 그녀는 목욕탕에서 잠옷의 허리띠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명성이나 재물보다 그리고 미모보다 더 소중한 것은 희망이다. 삶의 의미이다.
진수성찬을 못 먹어 잔치를 그치는 것이 아니다. 희망이 메마르기 때문에 더 이상 잔치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다. 오월을 왜 계절의 여왕이라 부르는가? 희망의 메시지를 곳곳에서 접하기 때문이다. 오월의 카렌다는 넘어가지만, 우리 모두의 가정이 희망의 가족, 우리나라가 희망 공화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삶을 탈취하려는 시도가 처처에서 때로는 증오로, 때로는 사상오염으로, 때로는 악한 사회구조로, 때로는 질병으로 일어나지만 우리 모두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을 받아 태어난 존귀한 사람이기에 잔치는 계속되어야 한다.
잔치하는 당사자가 되라. 귀하가 잔치하는 삶을 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온 세상이 도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