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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봄은 개나리와 버들강아지를 통하여 달려오지만, 사람의 봄은 부드러운 영혼을 통하여 다가옵니다.
지난 3월 1일 우리교회 소그룹다락방인도자인 남녀 순장님들과 함께 거제도로 나들이를 하였답니다. 목적지를 향하여 떠나기 전 새벽기도 시간에 우리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 희망의 동산으로 계속 발전하기를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기미년에는 제국주의 일본의 억압아래, 지금은 저 북한땅이 여전히 낡아 폐기처분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아래 신음하는 현실의 가슴 아픔이 하루 속히 해결되도록 마음을 모았습니다.
대진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면서 차창을 통해 눈에 들어오는 정감어린 조국의 산하를 마음껏 호흡하였습니다.
거제도에 도착한 후 약간의 파도가 일렁거렸지만 해금강과 외도를 소년소녀의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방문하였습니다. 모두가 기뻐한 하루였습니다. 다시 대전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몇 가지 마음에 새겨진 느낌을 건져 올릴 수 있었습니다. 과연 새봄을 새 봄되게 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콘크리트 문화에서는 자연의 살가운 소리와 모습을 온전히 느낄 수도 없고 담아낼 수도 없습니다. 봄의 소리에 마음의 귀를 열지 않으면 내면은 굳어지고 초췌해 집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의 창조주이실뿐 아니라 자연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안에서 인간과 자연의 가장 놀라운 조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한 번씩 자연의 품에 안기는 것은 피곤한 정신과 육체에 삶의 산소를 공급하는 축복된 경험이 됩니다.
여전히 남쪽의 바다와 바다속의 금강은 우리 모두에게 넉넉한 모습으로 다가왔답니다.

둘째, 지치지 않는 도전정신입니다.
외도를 방문했을때 가진 첫 느낌은 자연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치열한 도전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보여지는 외도는 부부개척자의 땀과 눈물의 현현이었습니다. 수많은 난공불락의 도전 속에서도 억척스럽게 목적을 달성하였던 인간정신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과거 돼지를 방목하는 곳이 이제 비너스 가든으로 탈바꿈한 것을 보면서 모두는 경이로움의 현장에서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도전정신을 상실하면 마음에 굳은살이 박히게 됩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내 딛는 걸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더 나은 사람됨을 위하여 외치는 결의는 아름답습니다. 육신의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나이가 문제입니다. 명분보다 더 추구해야 할 것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도전정신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외도를 방문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평화로움과 신선함은 땀과 눈물로 피어올린 꽃이었습니다. 열정 가득 도전하는 정신은 많은 이에게 기쁨을 선물하였습니다. 새봄에는 새롭게 도전하는 소리와 몸짓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우리의 삶에서 도전정신을 제거한다면 과연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현실에 안주하는 동안은 마음이 겨울을 삽니다.
두껍게 쌓인 자기 합리화와 무디어진 생각의 자리를 떨쳐 일어난다면 새로운 역사창출을 위한 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셋째 사람 존중입니다.
옥포 대우조선소를 방문했을때 우리 모두는 두 가지의 세계 최고를 보았습니다.
일명 골리앗크레인이라고 하는 거대한 철강탑과 배를 짓는 도크(dock)였습니다.
얼마전만 하더라도 일본이 해양국가로서 그들의 탁월한 배 만드는 기술로 세계를 석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자만이라는 몹쓸 병에 걸리게 됩니다. 곧 고객들의 만족보다는 자신들의 기술력을 과시하는데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그 결과 배를 만드는 고객들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었고 거래선을 우리나라로 옮겼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에는 세 곳의 조선소가 세계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답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서로 마음에 따스함을 경험합니다.
사업처나 가정에서 서로 깊이 있게 사귀려면 반드시 상대존중의 미덕이 뼈 속 깊이 경험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12)
복음은 그 핵심이 인간존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존중의 절정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따뜻한 가슴을 열고 우리 이웃과 자녀들을 환영하며 섬깁니다.
우리교회는 봄동산 같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봄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봄 내음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노래하셨습니다.
공중의 새와 백합화와 벗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관행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시기 위하여 시퍼런 도전정신을 직접 삶으로 옮겨 놓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존중에 올인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심정이었습니다.
봄을 산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계절인 봄을 누가 두려워하겠습니까? 새봄을 새 봄되게 하는 최고의 비결은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새봄의 시작 예수그리스도
행복의 시작 새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