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작성일 | 2022-0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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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cp=nv |
언론사 | 국민일보 |
기자 |
아버지 개척교회 목회 중에도 돈 꾸러 오는 이들 기꺼이 도와
| 오정호 목사의 진국 목회 <4>
오정호(가운데) 대전 새로남교회 목사가 1976년 부산 중앙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친구들과 함께했다
부산 가야제일교회가 개척교회 시절이던 1960년대 중후반 어느 날이었다. 남루한 차림의 사람이 찾아왔다. “저는 조금 전 출소했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 십자가를 보고 왔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따뜻하게 맞아들여 식사를 함께했다. 그 자리에 나도 있었다. 어렸을 때라 눈치를 흘끔 보며 식사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사연을 다 들어주시고 그 사람이 집을 나설 때,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격려금까지 줘가며 배웅했다.
그런데 문제는 며칠 후 발생했다. 노회 주최 체육대회에 온 가족이 참석했는데, 돌아와 보니 집안이 온통 어질러져 있었다.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에 값나가는 물건이라도 있었을까.
그는 심지어 내 성경책까지 가져가서 중고서점에 팔아버렸다. 나중에 책을 가까스로 찾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때 선한 일을 한다고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가야제일교회가 위치한 가야동은 가난한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살던 달동네였다. 동네 아이들은 이발소에 자주 갈 형편이 못됐다. 아버지는 이발기(바리깡)를 사서 아이들의 머리를 시원하게 빡빡 밀어주었다. 그 당시는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이 머리를 빡빡 밀던 때다. 머리가 밀린 아이들 가운데서 일부는 교회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는 재정에는 아예 관심이 없으셨다. 신학교 동기가 돈을 빌려 달라고 여러 차례 하소연했다고, 그나마 없는 돈을 만들어 주고 보증까지 섰다. 일이 잘못되어 돈은 다 떼이고 사람마저 잃어버릴 처지가 되었다.
나중에 수세에 몰린 그가 찾아왔다. “오상진 목사님, 용서해주십시오. 한 번 더 도와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을 돕는 바람에 가세가 더 기울어졌다. 어머니는 이 일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하셨다. “그 돈으로 우리 현이, 호야 고기라도 사 먹였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이 일로 보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아버지는 슬그머니 방으로 사라지시곤 했다. 그런데 더 기막힌 건 같은 사람에게 세 번이나 보증을 섰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1976년 내가 총신대 1학년일 때 일이었다.
목사가 77년 서울 사당동 총신대 교정에서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학교 뒷동산에서 지금은 러시아 선교사로 가 있는 6촌 형과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빚보증으로 어렵게 했던 OOO를 용서하라”는 벼락 치는 듯한 음성을 들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전혀 예기치 않던 상황을 접하고 아버지께 편지를 써서 상황을 말씀드렸다. 아마도 개척교회 목회자의 마음에 맺힌 아픔을 주님께서 아들을 통해 위로하신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개척교회에 출석하던 사람 중에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와서 공장에 다니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대개 태화고무(말표)를 비롯한 신발공장에 다니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중 사택에 급하게 돈을 빌리러 오는 이들이 있었다.
이유도 갖가지였다. “목사님,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약값이 부족한데 어쩌죠.” “결혼 자금이 부족해요. 좀 도와주세요.” “고향에 돌아갈 여비가 부족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반드시 돈을 갚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중 실제로 돈을 갚은 이는 많지 않았다.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에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이래저래 돈을 마련해 도와주면 이후엔 함흥차사처럼 사람도 돈도 돌아오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돈 문제에 대해서는 왕도가 없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깨달은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예배당 건축은 목회자의 피를 마르게 하는 일이다. 아버지는 마음먹고 벼르다가 예배당 건축을 시작했는데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져 일이 꼬여버렸다.
규모도 크지 않은 예배당의 건축이었지만 죽도록 고생하셨다. 그러나 훗날 부모의 헌신과 고생이 자녀인 나에게 이어져 사역하면서 예배당과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예배당은 말이나 돈으로만 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눈물의 헌신으로 지어진다는 것을 이미 어린 시절 나는 터득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어머니께서는 안용준 목사님께서 지은 고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인 ‘사랑의 원자탄’을 가까이 두셨고, 안이숙 사모님의 ’죽으면 죽으리다’를 반복해 읽으셨다. “정호야, 안 사모님 신앙 결기와 담대함이 대단하구나.” 어머니는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후속편으로 나온 ‘죽으면 살리라’도 어머니께서 애독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성경 암송에 능하셔서 성도들만 출전하는 성경 암송대회를 한편으로는 기뻐하셨으나, 사모로서 출전하지 못함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주님의 인도하심과 부르심에 대해 늘 마음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신학을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로에 대해서 부모님과 논의하는 가운데 내 마음이 신학으로 기울어졌다. 기도하는 가운데 총신대학으로 진학하게 됐다. 몸은 총신의 교정을 거닐었지만, 마음은 스산하여 뿌리 내리지 못한 나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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