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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존귀한 우리 아이를 존귀케1 - 황현주 교수

2014.10.01 19:26

조회 수:1047 추천:2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가는 아이들

 

                                                                                        황현주 교수(혜천대학교 아동보육과)

 

존귀한 자녀를 꿈꾸는 부모

매스컴이나 신문을 떠들썩하게 장식하며 사람들의 존경과 관심을 받고 있는 이 시대의 대표 지도자들을 대할 때 일반적인 부모들이 갖는 태도는 바로 ‘선망’일 것이다. ‘어떻게 그처럼 잘 자랐을까?’, ‘저들의 부모들은 저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하며 부러워하는 것이다. 가령, 안보리의 만장일치로 2011년 재임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외교력이나 덕망, ‘디자인 지도자’로 불리며 세계적 권위의 상을 휩쓰는 김영세 이노디자인 설립자의 창의력과 감각, 발레와 피아노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은데 이어 아시아 여성 최초로 하버드 법대 종신교수로 임명된 석지영 교수의 천재성과 화려한 이력을 보면서 자신의 자녀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아마 없을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부모 된 우리 모두에게는 이러한 마음의 소원이 있다.

 

‘우리 아이가 정말 이런 사람들처럼 존귀하게 자라주길…'

‘부디 꼬리가 아닌 머리가 되어주길…’

‘최소한 나보다는 큰 사람이 되어주길…’

 

우리 아이가 존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이러한 바람은 부모로서 갖는 당연한 것이며 또한 성경과 대립되는 생각도 아니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5:1-3)”

이 구절에서 ‘하나님’, ‘창조’, ‘사람’, ‘모양’이 각각 세 번식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단어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의미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모양(형상)으로 창조하셨다.”

 

목표에 집착하는 부모

우리 아이들은 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자녀들이 뛰어난 지도자가 되고 존귀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자체는 성경적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부모들은 이 존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지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대다수의 부모가 이 존귀함에 이르기 위한 자녀교육을 생각할 때 조기교육이나 사교육을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름지기 교육이란 빠를수록, 많을수록, 비쌀수록 좋다는 신념이 많은 부모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이름을 날리고 존경받는 사람들의 삶의 이면이나 태도, 가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그들이 가진 드러나는 스펙에만 초점을 맞추는 까닭이다. 그들을 모방하기 위해서는 해외 유수 대학이나 국내 상위 대학에 자녀를 입학시켜야 하고 그러한 부모들의 갈망이 초등학생 때부터 우리 아이들을 끝없이 학원으로 전전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어려서부터 사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그리 흔한 편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거의 모든 아이들이 사교육을 받고 있는 현실이니 가히 ‘사교육의 광풍’이라는 표현이 틀린 말이 아니다. 서울 강남에서는 엄마들조차 경쟁이 치열해서 아이가 어떻게 공부하고 어느 학원에 다니는지 물어보는 것은 서로 예의 없고 몰염치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다리품을 팔며 애써 얻어낸 귀한 정보를 노력도 없이 거저 얻어가려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내 아이를 잘 키워보겠다는 부모의 열망은 ‘내 아이만 잘 키우겠다’는 이기적인 열심히 되었다. 존귀한 자녀의 꿈을 실었던 배는 사교육의 바다에서 길을 잃었고 더불어 우리 아이들 역시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그 꿈을 붙들고 표류하고 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아이들

해마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나면 수험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기사가 반복되고 있다. 올해도 수능 직후 한 아이가 자살을 했고(서울신문2011년 12월 12일), 그에 앞서 너무나 끔찍하고 상상할 수 없는 사건 하나가 우리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고3 아들이 공부만 닦달하던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8개월간 방에 둔 채 학교를 다닌 사실이었다(한국일보 2011년 11월 26일). 이 아이는 경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전국 1등을 해야 하는데 의지가 약하다’며 밥을 안 주거나 잠을 못 자게 했고, 사건 당일엔 밤부터 아침까지 엎드려 뻗친 채 야구방망이와 골프채로 수백 대 맞았습니다.” 공부에 대해 집착하는 어머니가 두려워 이 아이는 모의고사 성적표를 위조했는데 어머니가 학교에 오면 성적 위조가 들통 날까 봐 불안해하다가 결국 어머니를 죽인 것이었다. 수능 직후 자살을 선택한 아이도 죽기 전 자신의 동생에게 “너는 나처럼 살지 말고, 잘해라.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너무나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분명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이 같은 사건들을 암시하는 우리 아이들의 현실과 정서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아이들의 학급엔 친구가 없고, 정보를 나눈다든가 노트를 빌려주는 일 따윈 사라진지 오래다. 소소하게는 시험기간에 공부 잘하는 아이를 방해하려고 책을 훔쳐가는 웃지 못 할 일들도 일어나는가 하면, 늘 1등을 차지하는 친구의 그늘에서 괴로워하며 그 친구가 죽어 없어지길 바란다는 만년 2등 아이의 섬뜩한 고백도 들을 수 있다.

또래집단의 관계 속에서 우정과 신의, 희생과 배려, 도전과 성장 등의 가치를 배워가야 할 우리 아이들이 무분별한 경쟁에 내몰린 채 타인을 짓밟아야만 이길 수 있는 잔인한 현실의 논리를 먼저 체득하고 있다. 그래야만 존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부모들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성적과 일류대 입학이라는 중압감 아래서 우리 아이들의 정신과 영혼은 압사 직전인데도 우리의 부모들은 너무나 무심하다. 그러나 과연 이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공부성적만 뛰어나고 수능점수만 높게 따내면 그들이 원하는 존귀한 사람, 시대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21세기 지도자들의 생각

오늘날, 소위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의 생각은 사뭇 다르다. 그들은 다음 세대들이 21세기의 리더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창의성리더십(포용력), 열정끈기라는 네 가지 자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며 스스로 목표를 세울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함께 그 목표를 위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해내고, 자신이 세운 목표를 위해 어떤 좌절과 실패가 와도 다시 일어나는 열정과 끈기를 지닌 사람이야말로 21세기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부모들이 생각하듯 다른 사람보다 빨리 공부를 시작하고 더 비싼 과외를 받으며 더 많이 공부한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 결코 아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처럼 단시간 내에 속성으로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달리 말해 인성에 관한 것이며 됨됨이에 관한 것이다. 오랜 시간 수많은 시공간과 관계들 속에서 형성되어지는 것들이다.

때문에 틀에 박힌 암기식 지식에 길들여진 아이는 결코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주어진 계획표 아래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학교와 학원과 집을 전전하는 아이들에게 열정은 참으로 낯선 말일 것이다. 스스로 인생을 계획하고 도전해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저 남보다 더 나은 성적이 목표였던 아이들이 어디서 리더십과 포용력을 배울 수 있겠는가? 더욱이 인내란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지금을 양보하는 것인데,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목표를 향해 떠밀려 가는 일이 즐거울 리 없으며 따라서 인내할 이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이 창의성과 리더십(포용력), 열정과 끈기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놀이와 독서 - 즐거움이 배움이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놀이는 __하다’라는 주제로 짧은 글짓기를 해보도록 한 적이 있다. 많은 학생들이 낸 의견을 종합해보면 대략 이런 것들이다.

 

“놀이는 창의적이다” “기발하다”

“놀이는 새롭다” “무궁무진하다”

“놀이는 함께 놀면 더 재밌다”

“놀이는 아무리 놀아도 지치지 않는다”

 

학생들의 이 같은 답변들은 모두 진실이고 정답이다. 저 문장들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놀이 안에는 창의성과 리더십, 열정과 끈기가 모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부모들이 그토록 경계했던 ‘논다’라는 행위에는 새롭고도 자발적이며 공동체적인 즐거움이 어우러져 있다. 아이들은 놀이를 하며 자신을 스스로 개성화하고 발견해간다. 그뿐인가? 잘 노는 아이는 체력까지 좋다! 놀이의 가치는 유아교육과 아동학을 전공한 모든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는 사실이다.

한편, 놀이의 가치와 더불어 성장해가는 아이들을 위해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그것은 단연 독서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독서는 아이들에게 강요되는 또 하나의 숙제로 전락한 면이 없지 않지만, 사실 독서는 본래 놀이에 가까운 것이다. 무언가를 배우고 안다는 것은 쾌락, 곧 즐거움을 동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앞서 예로 들었던 석지영 교수 역시 오늘날의 자신을 만든 원동력을 독서라고 고백한다. 지금도 독서광인 석 교수는 어렸을 때 독서의 즐거움을 이렇게 회상한다. “책을 읽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어릴 적에 깨달았고, 나에게 독서는 비밀스러운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엄마가 매일 동네 도서관에 데리고 다니셨다. 스스로 책을 찾고 발견하는 즐거움을 그때 알았다. 엄마는 자기 전에도 늘 책을 읽어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책 자체보다는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그 시간을 좋아했던 것 같다. 엄마와 눈을 마주치고 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보호받고 있다는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아늑함 속에서 책 속 모험까지 경험하게 되니 책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우리 아이들에게 똑같이 한다.”

석교수의 독서가 어딘지 모르게 관계적인 애정과 창조적 즐거움이 가득한 놀이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잃어버린 존귀함을 찾아서

기억하자. 우리 부모들이 그처럼 애가 닳게 아이가 해주기를 바라는 공부라는 것은 장기전이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4년, 대학원 2년 이상, 박사는 3년 이상이 걸리는 마라톤이다.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20년이 넘게 걸리는 이 긴 과정을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로 하여금 100m 달리기 경주를 하듯 하게 한다. 초반에 모든 힘을 쏟아 부어 이내 금방 지쳐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수능시험이 끝난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대학 가서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 대부분의 아이들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쉬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모든 것을 꾹 참고 ‘대학 가서’ 하려고 하는데 무슨 공부를 더 하라는 말인가요?”라며 오히려 반문할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참 안타까운 것이 바로 요즘의 학생들은 궁금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공부에 너무 질려서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호기심이 배움의 동기부여가 되어야 하는데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다. 아이들 표현대로 ‘그냥 멍 때리고 싶을 뿐’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놀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모처럼 시간이 주어지면 잠을 자거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서핑이나 게임을 하고, 아니면 그냥 TV를 본다. 곁에 친구를 두고도 자기 핸드폰이나 MP3를 만지작거릴 뿐,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친구들과 이야기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친한 친구가 있어도 문자로 대화하는 것이 편하지 직접 만나면 할 말도 없고 오히려 부담스럽다는 아이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놀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지금은 노는 것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학원에서 배워야 하는 이상한 시대가 되었다. 배움이 즐거움이 아닌 스트레스인 아이들, 놀 시간이 있어도 놀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서 세계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구원의 열정과 인내를 지니신 그 하나님의 형상은 온데간데없다. 경쟁과 성적에 짓눌려 진정한 자기 자신과 영혼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제는 하나님의 형상과 존귀함을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할 때이다.

 

 

글/황현주 교수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겸임교수였으며, 현재 혜천대학교 아동보육과 교수로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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