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기독교의 자유를 허(許)하라- 이상규 교수
2016.07.26 16:25
기독교의 자유를 허(許)하라
- 4세기 로마제국에서의 교회 -
이상규 교수 (고신대학교 신학과)
기원 30년경 예루살렘에 교회가 설립된 이후 기독교는 민족주의적인 유대교와는 달리 이방 세계로 확산되었고, 110년 혹은 115년경에는 로마제국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의 순결한 생활, 기독교회가 가르친 평등사상,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의 사랑의 실천은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복음에는 생명이 있었으므로(요 1:14) 모진 박해와 탄압의 와중에서도 요원의 불길처럼 제국의 들판으로 퍼져 나갔다. 4세기에 접어들자 이제 기독교인은 무시 못 할 공동체로 성장했다.
예일대학교의 고대사학자인 램지 맥뭘런(Ramsay MacMullen)은 1세기 말부터 4세기 초, 곧 312년까지 매 세대마다 그리스도인이 약 50만 명씩 증가했다고 추산했다. 그는 기독교회가 로마제국 전역에 걸쳐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전체 인구의 5~8%가 기독교인이었다고 추산했다. 고대사회는 통계에 무심했기 때문에 정확한 성장도를 추정하기 어렵지만, 독일 에르랑겐대학의 볼프강 비쉬마이어(Wolfgang Wischmeyer) 교수는 최근 연구에서 기독교인 수가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20%를 상회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불법의 종교였고 박해하에 있었으나 쇠하지 않는 생명력으로 제국의 도시와 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는 점이다. 박해는 기독교의 전파를 막지 못했다. 더 이상 박해가 능사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회는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300여 년간 ‘불법의 종교’라는 이름으로 박해받았던 기독교는 313년 제국의 공인을 받게 되고, 드디어는 380년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4세기는 기독교 역사의 분수령이 된다. 이제 이런 변화의 현장으로 안내하고자 한다.
변화의 시작
305년 이래로 로마제국에는 네 사람의 권력자가 제국을 분점하여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동방에서는 리시니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어가, 서방에서는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려는 암투가 시작되었다.
서방의 콘스탄티누스는 288년경 출생했는데 아버지 콘스탄티우스1세에 이어 부제(Caesar)가 되었고, 305년 황제에서 퇴위한 막시미안의 딸인 파우스타(Fausta)와 결혼했다. 그는 서방의 황제가 되고자 했다. 한편 막센티우스 또한 그의 아버지 막시미안의 후원을 얻어 308년 서방의 황제가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방의 중요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처남·매부지간이었으나 이제 서방지역의 두 권력자인 이들 간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접전은 불가피했다.
이미 영국과 고올 지방에서 지지를 획득한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10월, 막센티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진군하였다. 이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미트라스(Mithras)라는 종교의 신봉자였다. 미트라스는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준다고 믿는 종교였고 군인들이 선호했던 종교였다. 전투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밤, 종교의식을 행하고 희생제물을 바쳤음에도 승리의 확신이 없던 콘스탄티누스는 예기치 못한 환상을 보게 되었다. 궁정사가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에 의하면 전투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는 “이것으로 승리하리라”(In hoc signo vinces)는 계시와 함께 십자가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역사가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의 상징을 병사들의 방패에 부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환상을 따라 콘스탄틴은 헬라어 ‘키’(χ)와 ‘로’(ρ)를 겹쳐 쓴 것처럼 보이는 문장(紋章)을 그린 깃발을 가지고 임전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칭하는 그리스어 ‘크리스토스’(χριστος)의 첫 두 문자 키(χ)와 로(ρ)를 겹쳐 쓴 것으로, 기독교의 상징이었다.
다음날 곧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로마 북쪽의 테베레 강을 사이에 두고 막센티우스 군대와 접전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군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막센티우스는 티베르 강을 건너 도망가다가 밀비안(Milvian) 다리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콘스탄틴은 서방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십자가 환상과 전쟁의 승리를 경험한 콘스탄티누스는 미트라스 신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듬해인 313년 1월,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기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밀라노칙령’(Edic of Milan)을 발표하고 기독교를 공인(公認)하였다. 말 그대로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금하던 각종 칙령은 취소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박해 시절 압류되었던 각종 재산은 반환되었고, 다른 종교와 동일한 법적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이다.
급격한 변화의 현장에서 유세비우스는 이렇게 썼다. “놀라운 일을 행하신 주님께 새 노래로 찬양하라. 어둡고 고통스러운 날이 지난 후 지난날의 무거운 짐을 벗고, 광명을 누리게 되었도다.” 이 당시 로마제국 내의 기독교 인구는 전 인구의 10%로 간주된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있다. 그가 진정으로 기독교로 개종했는가? 아니면 정치적 행위였는가? 개종했다면 그때는 언제인가?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감독 중의 감독’이라고 하였으나 개종 후에도 이교도들의 제전에 참석하였다는 점 등을 미루어 그의 개종의 순전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그의 기독교 공인은 정치적 행위였다고 지적한다. 즉 그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정략적 이유에서였다는 것이다.
독일의 역사가 불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는 콘스탄티누스의 전기를 쓴 유세비우스가 역사가로서 비판의식이 없이 무조건 찬사만 늘어놓았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의 참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비판하며 “콘스탄티누스는 사실상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한 번도 자신이 기독교도라고 뚜렷하게 주장한 일이 없었다. 기독교를 이용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는 분명히 개종한 신자였다고 주장했다.
동방에서도 자유를 누리게 된 기독교
이제 동방의 경우를 살펴보자. 기독교를 심하게 탄압했던 갈레리우스는 중병에 걸려 311년 사망하고, 리시니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어가 일리리아부터 아라비아까지 통치권을 분할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와 동맹을 맺고 그의 사촌 여동생 콘스탄스와 결혼한 리시니우스는 막시미누스 다이어를 공격하여 승리하고, 막시미누스 다이어는 314년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서방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최고 통치자가 되어 서부 유럽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다스리고, 리시니우스는 동방의 최고 통치자가 되어 이탈리아와 이집트 지역을 통치했다.
로마제국은 한없이 넓었으나 권력은 독점하기를 원했던 두 사람. 서방의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리시니우스는 경쟁자가 되어 군사적 대립을 하게 된다. 여러 차례의 접전 결과, 콘스탄티누스는 314년에 비잔틴을 정복하고 323년에는 리시니우스가 다스리던 전 영토를 장악했다. 오랜 내전을 끝내고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서방에 이어 동방지역에서도 기독교가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콘스탄티누스는 337년에 죽기까지 13년간 로마 황제로 제국을 통치하였다.
330년, 콘스탄티누스는 수도를 동방의 비잔틴으로 옮겼다. 그는 이곳에 역사상 영원히 남을 ‘새 로마’(New Rome)를 건설하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도시를 개발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명명하였다. ‘콘스탄틴의 도시’란 뜻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거대한 도시로 만들었고, 이곳은 천년 이상 옛 제국의 정치,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는 도시가 되었다. 이 동로마제국을 보통 비잔틴제국(Byzantium Empire)이라고 부른다.
제국의 종교로 변모하는 기독교
기독교의 공인 후 박해는 종식되고 기독교는 점차 제국의 종교로 변모되어 갔다. 콘스탄티누스의 전임 황제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기독교를 박해하였듯이, 콘스탄티누스도 유사한 이유에서 기독교에 관용을 베풀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보호를 받았고 차츰 권력의 비호까지 받게 되었다. 예배를 위해서 교회당이 건축되었고, 감독과 설교자들은 국가로부터 급료를 받았다. 도시에서의 주일(主日)은 안식하는 날로 지정되어 그 준수가 의무화되었다. 이런 변화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319년 이교(異敎)의 제사 금지, 교직자의 납세 면제
321년 교직의 상속권 허락, 도시인들의 주일 휴무 의무화
323년 콘스탄티누스 로마제국의 통치자가 됨
324년 모든 군인들에게 지존의 신에 대한 예배 강요됨
325년 니케야종교회의(제1차 세계 교회회의) 개최
330년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플로 개칭
380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됨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7년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 그가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았던 것은 당시의 잘못된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다. 즉 로마의 헤르마스(Hermas of Rome)가 쓴 『목자』(Pastor Hermae)라는 책에서 “세례를 받은 후 용서받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사망한 후 제국은 다시 넷으로 나누어지는 등 곡절이 있었으나, 379년에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I)가 황제가 된다. 이듬해, 곧 380년 2월 27일에 그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승인했다.
엄청난 변화였다. 과거에는 기독교가 불법의 종교였으나 제국의 합법적인 유일한 종교가 되었다.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의 길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적 용단을 필요로 했으나, 이제는 영광과 지위와 명예를 얻는 길이 되었다. 과거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존을 걸고 투쟁해야 했으나, 이제는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과거에는 기독교 예배가 금지되었으나 이제는 이교 숭배가 금지되었다. 교회는 재산이나 유산을 기증받을 수 있도록 허용되었고, 부를 향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특권을 얻는 것이었으므로 많은 이교도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박해와 시련의 날은 지나갔다. 이제 기독교는 이른바 ‘국가 종교’(State Religion)가 된 것이다. 그래서 4세기는 교회사의 분기점이 된다. 이런 이유에서 4세기 이후의 기독교회를 그 이전의 교회와 구분하여 ‘콘스탄틴적 기독교’(Constantinian Christianity)라고 부른다.
마치며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일은 잘된 일일까? 아니면 잘못된 일일까? 물론 잘된 일도 있을 것이고 잘못된 일도 있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기독교의 국교화는 기독교의 속화와 변질을 가져왔고, 교회 타락의 시원이 된다. 종교가 권력의 힘을 의지하게 될 때 본래적인 이념과 정신으로부터 이탈하게 된다. 기독교가 국교가 된 이후부터 ‘나그네 공동체’가 ‘안주 공동체’로 변모되면서 현세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그것이 부와 권력과 명예였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한 욕망은 본래의 기독교로부터의 변질이었다. 이것이 교회의 속화와 변질의 시작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다”(We live in this world, but not of the world)는 코넬리우스 반 틸(Conelius van Til)의 경구는 오늘 우리에게도 유용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글/이상규 교수
미국 Calvin College와 Associated Mennonite Biblical Seminary 방문교수, 호주 Macquarie University 초기기독교연구소 연구교수, 고신대학교 부총장을 역임. 현재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