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위대한 교회의 교사, 아우구스티누스 - 이상규 교수
2016.09.06 14:48
위대한 교회의 교사, 아우구스티누스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신학과)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기독교 교리 형성에 기여한 인물, 그래서 위대한 교회의 교사로 불리는 인물이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of Hippo, 354~430)다. 그에 대한 찬사는 끝이 없다. 그는 신약성경 이후 16세기 종교개혁기까지 기독교 사상사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로서 흔히 ‘은총의 박사’(Doctor gratiae)로 불린다. 그런가 하면 서방 기독교 신학을 체계화하고, 중세 천년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했으며, 종교개혁의 이념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nas, 1225~1274)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간주되어 왔다. 그는 고대의 마지막 사상가이자 최초의 중세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역사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피력했지만, 특히 신앙과 이성의 관계, 악의 문제, 하나님의 은총론과 예정론, 삼위일체론 등이 주된 관심의 주제였다. 그러나 그의 교회관과 성례관은 중세 기독교, 곧 로마 가톨릭 교리 발전에 기여했다. 이런 점 때문에 그는 신구교 양측으로부터 지지와 사랑을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삶을 살고 무엇을 가르쳤을까? 이제 그가 걸어갔던 삶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가정배경과 젊은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약 1700년 전의 인물이다. 354년 11월 13일 북아프리카 누미디아(Numidia)의 타가스테(Tagaste)에서 파트리치우스(Patricius)와 모니카(Monica)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한 곳은 지금의 알제리 수카하라스(Souk Ahras)라는 곳으로 로마제국의 일부였다. 이곳은 지중해에서 내륙으로 약 96km 떨어진 곳인데, 근처의 메제르다 산맥을 경계로 바다와는 완전히 격리된 산간 지역이었다.
이렇게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백인이 아니라 누미디안(Numidian)으로 흑인이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는 흑갈색 피부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파트리치우스(Patricius)는 ‘쿠리아’의 지방 관리로서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타가스테에서 우리나라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고, 열두 살 때인 366년 마다우라(Madaura)로 갔다. 이곳은 타가스테에서 직선거리로 26km 떨어진 곳인데, 이곳 문법학교에서 370년까지 공부했다. 우리나라식으로 말하면 중등교육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자신의 『증언』에서 언급하듯이 성실하게 공부하지 않았고, 특히 헬라어를 기피하였는데 이 점은 후일 자신의 생애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지내게 되지만 16세 때인 371년, 보다 큰 도시인 카르타고로 옮겨가게 된다.
이때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계속하여 한 가지 죄, 혹은 다른 죄를 추구하였다. 그는 카르타고에 온 지 얼마 못되어 한 여성과 동거하기 시작하였고, 16~17세(371~372년) 때 아들이 태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분별없는 성적인 일에 탐닉했다고 볼 수 없다. 단지 결혼하지 않았을 뿐이고, 자신의 고백처럼 한 여인과 동거한 15년(371~385) 동안 “오로지 한 여자와만 살았다(unam habebam).”
마니교도, 회의주의자 아우구스티누스
바로 그때에 그는 마니교(Manichaeism)라는 종교 혹은 철학체계와 접하게 된다. 이원론적인 체계를 주장하는 마니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성에 호소력이 있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볼 때, 마니교는 악의 문제에 있어서 어머니의 종교인 기독교보다 합리적인 해답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니교가 기독교만큼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빠졌고, 9년간 마니교도로 살았다. 20대 후반에 가서야 마니교에 대하여 심각한 회의를 가지게 된다. 마니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문제들에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그 무능함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83년에는 연인과 아들을 데리고 지중해를 가로질러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수사학을 가르치며 살았다. 한때 아카데미아학파의 회의주의에 빠지기도 했는데, 384년에는 좀 더 안정된 직장을 찾아 로마를 떠나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 황실학교의 수사학 교사로 초빙된 그는 이곳에서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40~397)와 교분을 나누게 된다. 암브로시우스는 기독교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대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였음을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알리스터 멕그라드(Alister E. McGrath) 등 다수의 학자들이 이 점을 강조하지만, 최근의 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암브로시우스의 영향력은 미미했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방대한 저술을 남겼지만 단 한 권의 책도 암브로시우스에게 헌정한 일이 없었다는 점을 그 일례로 들고 있다.
지적인 방황과 회심
앞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심취했었으나 잠시 동안 회의주의에 빠져 있었음을 지적했는데 그 후에는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Plotinus, 250~269)의 작품들, 그리고 플라톤주의자들의 작품들을 섭렵했다. 신플라톤주의에 관한 연구는 회의주의에서 벗어나는데 영향을 주었고, 또 마니교의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영적 실재에 대한 확신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다가 386년에는 로마 교외의 한 마을에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이 점은 그의 『증언』 제8권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들고 읽으라(tolle, lege), 들고 읽으라”는 한 음성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나는 성경책을 잡고 펴서 나의 시선이 닿는 첫 구절을 조용히 읽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나는 더 읽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내가 그 문장의 문에 이르자 마치 그것은 나의 마음 안에 넘쳐 들어오는 신앙의 빛 같았으며, 의심의 모든 어두움은 사라졌다” -『증언』 중에서
이때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연의 처와 헤어졌다. 그녀는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남겨두고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종에서 암브로시우스의 영향력이 미미했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의 영향을 받았을까?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뒤를 이어 주교가 된 심플리키아누스(Simplicianus)였다고 게리 윌스(Garry Wills)는 주장하고 있다. 게리 윌스는 심플리키아누스가 4가지 방식으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끼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심플리키아누스를 ‘아버지’라고 불렀던 사실을 중시했다.
이렇게 회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387년 4월 24일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고,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북아프리카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모니카는 로마로 가는 항구 오스티아에서 놀라운 이상을 함께 나누었다. 이때는 모니카가 387년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로 돌아갔으나 그곳에서 아들 아데오다투스마저 세상을 떠났다.
회심 후 수년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을 연구하고 『회의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행복한 삶에 대하여』, 그리고 『독백』을 포함한 여러 권의 단편들을 저술하였다. 점점 더 종교적인 소명에 헌신한 그는 391년, 37세 때 안수를 받았다. 수도원을 세워(391) 수도생활, 곧 공동생활(ein gemeinsames Leben)을 지향하기도 했던 그는 발레리우스(Valerius)의 뒤를 이어 397년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그는 흔히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로 호칭되기도 한다.
이제 그는 잘 무장된 기독교 신학의 옹호자가 되었고, 이교와 철학의 오류를 반박하고,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마니교의 이단성을 공격하고, 인간의 원죄를 부정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분리주의적인 도나티스트들의 이설과 오류를 배격하며 보편 교회의 신학을 정립해 갔다. 그는 286명의 가톨릭 감독들과 229명의 도나티스트 감독들이 모였던 411년의 카르타고 회담(colloquium)에서 100여 년간 지속되어 왔던 분파주의적인 도나티스트들의 교회 분열을 종식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런 와중에서 제국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소위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변혁기에 서고트족(西Goth族)의 지도자 알라릭(Alaric)이 410년 로마를 점령했다. 서방세계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제롬이라고 불리는 신학자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348~420)는 그 충격을 “세계의 점령자 로마가 포로가 되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런 지상 나라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며 기독교 신학체계를 확립하며 한 권의 책을 집필했다. 그것이 『신국론』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 외에도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과 사상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작품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양 또한 엄청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망 직후인 431~439년에 『아우구스티누스 전기』를 쓴 포시디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1,030개의 저서명을 열거했을 정도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말년인 427년경에 쓴 『재고론』(Retractationes, Retract)에서는 427년까지 저술한 93개의 저서 목록을 열거했는데, 여기에는 500여 편의 강론(설교)들과 217개의 서간들은 제외한 것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약 8천 회 설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500여 편의 설교가 남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은 교부문헌의 최대 총서인 『민녀 라틴어 문집』 32~47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500쪽의 책으로 환산해도 수백 권의 분량이 될 만큼 방대하다.
1600년 전의 필사본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이 작품이 오늘에까지 전수되고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의 가치와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모든 작품을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다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가 구술한 것을 속기사가 기록한 것도 적지 않았는데, 때로는 교대로 일하는 속기사들이 밤늦도록 일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일주일에 여러 편씩 한 설교들은 그 자신이나 속기사들에 의해 속기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취급한 주제들은 자아 인식에서 시작하여 존재, 진리, 사랑,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 인간의 본성, 영원성, 시간, 자유, 역사, 섭리, 정의, 행복, 평화 등 철학적인 분야는 물론 기독교 신학 전반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길고 영향력 있는 연구서뿐만 아니라 그의 3그룹과의 논쟁, 곧 마니교와의 논쟁(386~395), 도나투스파, 그리고 펠라기우스파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반박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서전적 저술 (『증언』, 270여 통의 편지 등)
2. 성경주석(『기독교교리해설』을 비롯한 신구약 주석 및 해설적 작품)
3. 변증론적 저술(『신국론』, 『삼위일체론』 등)
4. 교리논쟁적 저술(마니교, 도나티스트, 펠라기안 등에 대한 비판적 저술)
5. 경건문학적 저술(금욕적 생활에 관한 저술 등)이 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313)된 후 41년이 지난 354년에 출생하여 76년의 생애를 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430년 8월 28일, 히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때는 반달족에 의해 히포가 점령된 후 포로가 된 지 3개월 만이었고, 서로마가 멸망하기 36년 전이었다.
글/이상규 교수
미국 Calvin College와 Associated Mennonite Biblical Seminary 방문교수, 호주 Macquarie University 초기기독교연구소 연구교수, 고신대학교 부총장을 역임. 현재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