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스케치] 흘러넘치는 생수, 아과비바 - 손은진 사모(상파울로 아과비바교회)
2016.10.25 15:04
흘러넘치는 생수, 아과비바
손은진 사모(상파울로 아과비바교회)
‘아미고(amigo)’의 나라, 브라질
브라질 민족성을 생각할 때 나는 ‘아미고(amigo)’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아미고(amigo)’는 포르투갈어로 ‘친구’라는 뜻인데 이곳 브라질에서 모르는 사람을 부를 때 편하게 쓸 수 있는 단어이다. 길거리에서 처음 본 행인에게도, 주차장에서 주차를 해주는 주차 요원에게도, 레스토랑 종업원에게도… 가릴 것 없이 그들은 “아미고!”라고 친근히 외친다. 모든 이를 친구로 생각하는 문화, 누구와도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문화, 기꺼이 “친구”라고 부르는 문화, 그것이 브라질이 아닌가 싶다.
브라질은 이민자의 나라이다. 파란 눈의 유럽인들도 브라질 사람이 될 수 있다. 검은 피부, 곱슬머리의 아프리카인들도, 노란 피부에 작은 눈을 가진 동양인도 브라질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이들이 브라질 사람이 될 수 있다. 자신과 다른 모습일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문을 활짝 열고, ‘친구’라며 반가이 맞아주는 것이 바로 브라질이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폐막식에서 2014년 월드컵 주최국으로 브라질이 선정되었다. 그 영광스러운 순간, 브라질을 소개하는 영상이 상영되며 브라질의 이민자들이 차례로 비춰졌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장면으로 한국 이민자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만큼 이제 한국 이민이 브라질 안에서 자리를 잡고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국 이민은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하였고 브라질 이민 2~3세들이 태어나고 있다. 브라질에는 한국인 이민 이전에 일본인 이민이 시작되었었고 일본인들이 심어준 좋은 이미지 때문에 초기에 그 덕을 톡톡히 본 것도 사실이다. 일본인이라고 하면 ‘자뽀네즈 가란치도(Japonese garantido)’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곤 하는데 말하자면 ‘일본인 보증수표’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일본인들에 대한 신뢰가 크고 그들 덕분에 브라질 내에 동양인에 대한 이미지가 굉장히 좋다.
하지만 지금은 K-pop 한류문화들이 들어오면서 한국 사람들에 대한 위상 역시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민 역사가 길어지면서 이곳에서 자란 이민 2~3세들이 의사, 변호사, 공무원, 사업가 등의 형태로 브라질 주류 사회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아과비바의 탄생이야기
브라질 이민 50년 역사 가운데 한국 이민 2~3세들이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브라질 내의 한국인 이민사회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이민 교회도 이제는 변화에 맞춰 대안 교회가 필요하다는 마음을 주셨다. “아미고”라고 하며 우리를 기꺼이 받아준 나라 브라질과 한국 교회가 받은 영적 축복을 나눠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다. K-pop과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그들은 이제 한국 교회의 영적 유산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한인 이민 목회를 하던 중 이런 비전을 받고 이민 교회를 떠나 2001년 아과비바교회를 시작하였다. 편안한 삶이 보장되었던 한인교회를 박차고 나와 젊은 2세들과 개척을 한다고 하니 주변의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한국인에게만 허락되는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인종과 언어의 벽을 넘어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세우는 신앙의 공동체를 꿈꾸며 이 사역을 시작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같이 비전을 품고, 믿고 따라주었던 젊은이들의 희생에 고마울 따름이다. 섬기는 마음으로 희생해주었던 1.5세, 2세 한인 청년들이 없었더라면 아과비바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에는 주일 점심시간 때에 김치나 한국 음식을 금지시키기까지 했었다.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 몰래 숨겨놓고 살짝 꺼내먹기만 해도 한국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브라질 성도 분들이 강한 냄새 때문에 얼굴을 붉히셨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음식뿐 아니라 많은 문화적 충돌 가운데에서 온전히 자기 것을 부인하고, 브라질 안에 완전히 흡수되려고 했던 희생과 순종이야말로 아과비바교회 탄생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싶다.
새로운 문화, 그리스도의 문화
모든 민족과 함께 예배드리는 비전으로 아과비바교회를 시작하자 여러 문화의 다양성이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피부색이나 생김새는 말할 것도 없고 각 사람의 지방색, 민족색에 따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문화가 너무나도 달랐다. 음식 이야기를 조금 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분이고 작은 교회 안에 정말 많은 문화가 공존했다. 동양 문화, 서양 문화, 라틴 문화, 브라질 안에서도 북쪽 문화, 남쪽 문화, 도시 문화… 너무 많은 문화가 공존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문화’였다.
다른 문화를 배타하고 무시하고 몰살시키고 획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를 인정하고 아우르고 조화시키고 하나 되게 하는 문화, 모든 문화 위에 문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문화’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배운 2가지의 문화를 아과비바교회 안에 적용하여 정착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선교’와 ‘제자훈련’이었다. 이 ‘그리스도의 문화’를 아과비바의 문화로 세우자, 우리 안에 있는 문화의 다양성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 교회를 시작해서 30~40명이 모일 때에는 전교인이 함께 선교를 갔다. 전세버스를 빌려 한 달씩 브라질 전역으로 선교를 떠났다. 전교인이 선교를 갔기 때문에 선교를 떠날 때면 교회 입구에 ‘교회가 문을 닫은 것이 아니고 선교여행으로 한 달간 예배가 없는 것’이라는 안내문을 붙이고 떠나야 했었다. 100시간이 넘는 버스 여행… 브라질 땅덩이가 큰 만큼 이동하려면 버스 안에서 먹고 자고 씻으며 하루 이틀을 가는 것은 기본이었다. 열악한 상황 가운데에서 사건, 사고도 많았다.
한번은 새벽에 버스가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르다가 미끄러져 쓰러지고 말았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상황은 더욱 아찔했다. 버스가 쓰러진 곳은 절벽 낭떠러지 코앞. 정말 불과 몇 미터의 차이로 버스와 우리 선교팀 전체가 절벽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 긴 민둥성이 산길 중에서 우리 버스가 쓰러진 곳에만 잔디와 소나무가 있었고 이것이 우리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을 간신히 붙잡아 주었다. 주님의 손이 우리 선교팀의 버스를 붙잡으신 것이다. 다행히 큰 딸 영은이 외에는 크게 다친 사람이 없었다. 선교팀 막내였던 2살배기 루까스도 좀 놀라긴 했지만 다행히 외상은 없었다. 턱밑이 찢어진 큰딸 영은이만 근방 병원으로 보내 치료받게 하고 우리는 선교를 계속 진행했다. 그렇게 한 달씩 함께 먹고 자고 우여곡절을 겪다 보니 정말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졌다. 더군다나 한국 사람, 브라질 사람의 구별은 우스운 것이었다.
지금은 교회가 커져서 선교 때문에 교회 문을 한 달씩 닫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선교는 우리가 주님께 배운 문화로써, 논쟁할 수 없는 아과비바 교회 사역의 큰 날개가 되었다. 아과비바는 일 년에 두 차례(1월, 7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선교를 떠난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께 배운 ‘그리스도의 문화’이다.
그리고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물론 제자훈련은 한국 교회의 배경 가운데에서 시작된 양육 방식이지만 가장 성경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문화와 언어를 넘어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재 하나하나를 번역했던 것은 전문 번역가도, 사역자도 아닌 우리 성도들이었다. 브라질 성도들과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자 하나씩 번역하기 시작한 것이 이후에 제자훈련, 사역훈련 교재들을 포르투갈어로 출판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우리 교회뿐 아니라 브라질 교회들까지 섬길 수 있게 되었다. 브라질의 전통 있고 역사 깊은 교회들이 제자훈련을 배우려고 겸손히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 교회보다 더 규모도 크고 역량 있는 교회들이 우리에게 배우려고 오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가장 성경적인 것이야말로 모든 문화를 포괄할 수 있는 것임을 느꼈다. 한국사람, 브라질사람이기에 앞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각자가 가진 문화와 관습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문화’가 몸에 밴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내일의 아과비바 교회를 오늘 세우면서
한 사람이 성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장하지 않은 사람을 볼 때는 ‘무엇을 주어야 할까?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그 사람이 성장하면 더 이상 ‘무엇을 줄까’로 고민하게 되지 않는다. ‘그와 무엇을 함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함께 비전을 품을 수 있을 때에 진정으로 그 사람이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과비바교회는 오늘도 꿈을 꾼다. 하지만 이 꿈은 12년 전에 우리 부부와 몇몇 한인 이민자들이 꿈꾸던 꿈과는 또 다른 꿈이다. 12년 전에 꿈꾸던 꿈. 인종, 언어, 문화를 넘어 열방이 함께 예배드리는 공동체의 꿈… 그 위에 우리는 내일의 아과비바교회를 꿈꾼다. 그 꿈은 열방이 함께 꾸는 꿈이다. 12년 동안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문화’를 나누고 성장해온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꾸는 꿈이다. 이제는 문화의 다양성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강점이 되고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아과비바’는 ‘살아있는 물’, ‘생수’라는 뜻이다. 살아있는 물은 흘러넘치는 물이다. 그 자리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니고, 가득 넘쳐 다른 곳으로 흘러가야 한다. 우리 아과비바교회가 이 이름처럼 살아있는 교회, 흘러넘쳐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다 흘러 보낼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12년 전에 아과비바교회를 시작했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젊은이들도 어느덧 40대 중년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젊다. 아직도 흘려보낼 것이 너무나 많다. 브라질은 아직도 열악한 지역이 많다. 상파울로만 해도 여러 가지 교육과 문화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는 곳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성도들을 도전할 수 있다. 아무리 우리가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흘러 보낼 것이 너무 많다고….
지난 12년의 아과비바를 돌아보며
12년 전에 아무도 모르는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쉬운 길, 발만 내밀면 되는 길이 우리 앞에 있었지만 그 길을 뒤로했다.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어 온 것이 바로 지난 12년의 아과비바의 역사였다. 그 어디에도 가이드라인을 찾을 수 없었고 그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길이었다. 가고 있는 우리조차도 그 끝이 어디일지 모르는 그런 길을 걸어 왔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여정이 가능했다. 한 사람의 목사나 사모가 꾸었던 꿈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꾸는 꿈이었기에 가능했다. 사모이기에 앞서 그들과 예배하고 꿈꾸는 한 사람으로 함께 해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길에서 서로에게 용기를 얻고 서로를 의지하며 그렇게 아과비바교회를 세워왔다. 그래서 우리는 ‘아과비바교회’라는 말보다는 ‘아과비바 가족’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피부색도 인종도 문화도 다르지만, 내 형제자매이고 내 딸과 아들이다. 핏줄로 이어진 가족들이 있지만 어찌 보면 진짜 피보다 더 진짜 피,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가족, 이 가족이야말로 내 삶에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이었다.
글/손은진 사모
상파울로 아과비바교회 고영규 담임목사의 아내이며 3녀의 자녀를 두었다. 외부 사역이 많은 남편을 위해 개인비서역을 자처하여 사역하고 있다. 음대와 기악(바이올린) 전공하여 교회 내에서 연주 그룹의 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