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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등산객들은 식용 산나물인 참당귀와 식중독을 유발하는 개당귀를 혼동하거나 독초를 식용으로 오해하여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어설픈 상식이 사람들을 어렵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생활을 할 때 어설픈 상식에 바탕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나도 어렵고 남들도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오해는 스스로 속는 것 입니다. 남이 속여서 속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오해란 헬라말의 원어는 ‘스스로 속임을 당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자기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오해란 말을 다른 말로 풀면 정도에서 벗어나는 것, 길을 잘못 드는 것, 판단을 그르치는 것을 가르켜 오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에 대해 4대 성인의 한사람 정도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이 오해를 제거하려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고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오해는 의사소통의 부재에서 옵니다 가나안 정복이 끝난 이후 요단강을 건너 가던 세 지파가 쌓은 단으로 인해 얼마전 까지 혈맹이었던 지파들이 전쟁을 하려는 모습이 여호수아 22장에 나옵니다. 한쪽에서는 서로를 잊지 말자는 기념비를 세운 것인데, 다른 한쪽에서는 우상숭배를 위한 단으로 오해했습니다. 의사소통이 오해를 가져옵니다. 부모의 세대와 자녀의 세대에 왜 오해가 생깁니까? 대화가 없기 때문에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부부간에도 대화가 넘쳐야 합니다. 문제 있는 가정의 조짐은 대화의 상실로부터 말미암습니다. 대화의 회복이 오해를 줄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대화가 하나님을 더 깊게 알게 합니다.

교만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가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부유하고 성도들 가운데 유력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기고만장하여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헐벗고 가난한 것을 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교만이 자신의 상태를 몰라보게 하며, 오해를 갖게 했습니다.
말씀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착각 속에 살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벗겨 지게됩니다. 린제이 페리코 라는 사람은 ‘성경에 의해 변화 받지 못한 사람은 오직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편견과 오해를 벗겨 주실 것입니다. 눈에서 수건이 벗어져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3장 16절-18절에 보면 모세가 수건을 썼던 사건을 이야기 해 줍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편견과 오해와 냉소와 무지의 수건이 벗어지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젊은날 일기장에는 1723년 8월 13일. ‘성경을 철저히 아는 일이 내 인생의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이런 기초위에 있을 때 내 인생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20살 때 결단하고 주의 뜻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톤 대학 총장으로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들도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후손 300명을 연구해보니까 100명이상의 목회자와 선교사 신학자가 나왔습니다. 100명이상의 법관이 나왔습니다. 60명 이상이 의사가 배출되었습니다. 70명 이상이 작가와 언론가가 나왔습니다. 14명의 대학총장이 배출되었습니다. 미국이 건국하는데 가장 영광스런 가문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상식으로 살지 말고 오해로 편견가운데 살지 말고 말씀의 지혜와 확신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 끌려 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을 이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