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 피어나는 복음의 새싹
중세교회 천년의 역사를 세 가지로 요약해 보면, 첫 번째는 뜨거운 영적 사모함이 있던 시대라는 점입니다. 세속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뜨겁게 사모하던 중세의 영적지도자들은 금욕적인 삶을 통해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뜨거운 지적 사모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해하려는 열망이 가득했던 영적 지도자들은 자체적으로 규율을 만들어 수도원을 설립하고, 묵상과 기도, 순종과 사랑의 실천에 힘썼습니다. 또한 수도원 안에 대학을 설립해 하나님을 향한 지식을 더욱 체계화시키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유럽의 많은 대학들이 바로 중세 교회 시대 만들어진 대학에 그 모체를 두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통해 많은 인물들이 배출됩니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고 말한 스콜라 철학의 시조 안셀무스, 이성과 신학의 조화로움을 추구해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중세가 낳은 위대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뜨거운 영적, 지적 사모함을 통해 중세교회의 세 번째 특징을 만들어냅니다. 바로 열정적인 선교라는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냅니다. 유럽의 여러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고, 그 복음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봉사와 헌신, 그리고 교육을 통해 미개했던 그 땅을 변화시켰습니다.
혼란과 타락의 그립자
그러나 중세 초기의 영적·지적 사모함은 점차 영적 타락으로 흘러갔습니다. 중세 후반에 이르게 되면서, 교권과 세속권력의 대립, 성적 타락, 성직 매매, 무지와 미신, 그리고 면죄부 판매와 같은 여러 어둠의 증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중세 후기의 성적 타락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일반 사제들은 물론이고, 주교와 추기경에 이르기까지 첩을 두는 일이 매우 흔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추행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부를 축적하기 위해 돈을 주고 성직을 사고파는 일이 흔했고, 그 영향은 일반 성도들의 신앙에 고스란히 미쳤습니다. 당시 중세 교회 안에는 라틴어 성경과 라틴어 설교만 허용돼 있었지만, 성도들은 성경을 가질 수도, 읽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영적 무지와 미신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로마 교황이 교회의 건립비용과 교회의 부족한 재정을 해결하고자 금전이나 재물을 봉헌한 사람들에게 죄를 면해주는 면죄부 증서를 판매하게 되면서 그 타락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서서히 부는 개혁의 바람
영적 타락으로 얼룩졌던 중세 후반, 하나님은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을 통해 의식이 서서히 깨어나도록 하셨고, 신대륙의 발견과 지동설로의 전환은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새 부대에 새 포도주’ 우리에게 참 익숙한 말입니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를 중심으로 한 로마교회 내부 개혁의 핵심 정신이기도 합니다. 당시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는 로마교회의 미신과 그릇된 신앙에 대항해 의식의 회복과 개혁에 힘썼고, 교황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던 존 위클리프는 ‘성경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지고의 권위이고 신앙의 기준이며, 모든 인간적 완전함의 기준’이라고 주장하며 성경 번역에 힘썼습니다. 그의 제자였던 얀 후스는 성경 연구를 통해 회심을 경험하였고, 성직 개혁의 열렬한 주창자가 됩니다. 그는 라틴어가 아닌 체코어로 설교했다는 이유로교황의 권위에 반하는 자로 낙인 찍혀, 결국 화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내부적인 개혁은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개혁을 향한 이들의 몸부림은 사라지지 않았고, 고스란히 종교개혁의 씨앗으로 연결됐습니다. 특별히 중세 말, 인쇄술의 발달은 르네상스 인문주의 속에서 초대교회 교부들의 책들과 자국어 성경 번역을 활발하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중세 어둠의 1000년이 서서히 걷히고 종교개혁의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