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싸이플] 우리시대의 강건한 남자성도는 어디에 있는가?
2007.04.11 14:20
제자훈련의 마에스트로인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교회다운 교회, 성도다운 성도가 되기를 꿈꿨다. 그는 고린도전서를 맺는 붓을 놓기 전에 목회자와 훈련자로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대한 거룩한 기대감이 가득한 그의 속재를 명령형으로 표현하였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3, 14)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던 성도의 이미지를 동사형으로 표현한다면 5가지이다.
1. 깨어 있는 성도가 되라(Be on the alert)
2. 믿음에 굳게 선 성도가 되라(Stand firm in the faith)
3. 남자다운 성도가 되라(Act like men)
4. 강건한 성도가 되라(Be strong)
5.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성도가 되라(Do everything in love)
우리 성경에는 “남자답게 강건하여라”로 번역이 부사처럼 되었지만 원의미는 동사로 “남자다워라”이다. 그렇다면 남성다움이란 무엇인가? 곧 강건함이 있는 성도가 되라는 말과 연결된 것으로 보아 믿음에 굳게 선 성도는 강건한 성도이며 동시에 남성다운 성도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남자답게”의 남자는 성인남자나 남편을 가리키는 남자이다. 곧 힘의 상징으로서의 남자이다. 교회는 남자성도와 여자성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가 강건한 남자 성도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주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초대교회가 처한 사회적, 영적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속화된 헬라로마문화의 바탕에서 복음진리가 꽃피기 위해서는 신앙의 강력한 공동체가 필요했다.
또 한가지 이유는 고린도교회내의 형편이었다. 교회내의 파당 짖기로 인한 분쟁, 성적문제, 세상법정 송사문제, 우상제물문제나 부활교회문제 등 교회의 본질을 약화시키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를 정면돌파(breakthrough)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영적 강건함이 필요했다.
아마 사도의 머릿속에는 로마의 정예군사의 모습이 그려졌으리라 생각한다.
최근 개봉된 영화 “300”을 마음먹고 관람했다. 기도온의 300용사의 이미지와도 일맥상통한 것이 동기가 되었지만 명색이 제자훈련 하는 목사로서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을 대항하여 온 몸으로 막아선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을 통하여 도전과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주님의 명령에 죽기까지 복종하며 교회의 순결함을 위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의 자리를 묵묵히 충성을 다하여 지켜내는 성도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상의 위협과 도전에 조금도 움츠리지 않고, 성도의 본분을 수행해내는 모습은 얼마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인가!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사도바울과 예수님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었다.
강건한 성도는 훈련의 열매이다
강건한 성도는 단번에 세워지지 않는다. 설령 불같은 성령체험이 있다하더라도 전인격적으로 집중하여 훈련된 삶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를 지적으로 수용하는 진리의 의식화훈련과 말씀의 삶의 적용을 통한 체질화와 생활화의 단계를 통하여 자신을 지키고, 맡겨진 영혼을 세울 수 있는 갖추어진 성도로 다듬어지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는 심혈을 기울여 제자훈련에 매진하셨다.
사도바울도 동일한 길을 걸어갔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치고 그저 적당히 되는 일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의 머리를 잡고 불이 내리도록 안수기도하시면 되지 구태여 여러해 동안 데리고 다니시면서 훈련시키는 고생을 왜 하셨을까 의아해 하기도 한다.
이들의 논리는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그것하나 해결 못하시겠느냐는 논리이다. 사람은 공업 생산품이 아니다. 제품이나 상품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인격이다. 인격을 빚고 다듬어가는 작업은 기계로 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사랑의 쏟아부음과 인격적인 상호작용을 통하여 한 사람의 전인적인 성장이 이루어진다. 필자는 논산훈련소 28연대 출신이다. 왜 논산교육소라고 하지 않고, 논산훈련소라고 부르는가?
지식의 전달이나, 마음가짐의 새로움으로 나타나는 동기의 출발은 순간 혹은 수일내에 이루어 질수 있다, 그러나 교육과정이나 목표가 체질화되기 위해서는 훈련과정을 생략하고는 불가능하다. 필자는 새로남교회에 부임한수 1년여의 제자훈련을 위한 정제작업후에 제자훈련을 한해도 거스르지 않고 현장목회를 지향해 왔다. 그런데 훈련을 하면 할수록 더욱 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 이유는 제자훈련 11년 동안 제자훈련목회자로서 눈이 열려 잘 보이 지 않던 부분이 계속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요즘 새로운 사역을 위하여 과거의 사역을 돌아보면서 속으로 외치는 말이 있다.
“내가 만약에 제자훈련 목회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 과연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제자훈련하지 않는 목회자들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저렇게 버티고 있는 걸까?” 물론 필자의 마음속에는 교회사이즈에 연연하는 것보다 교회의 건강성에 무게를 두고 있음을 알고 싶다. 놀라운 사실은 건강한 교회 곧 건강한 성도를 꿈꾸다보니 교회사이즈는 보너스로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지난 수년 동안 목회현장에서 예배당 건축을 통한 목회 외연의 확장과 성도수의 증가 및 내적인 성숙의 열매를 통한 하나님의 주체할 수 없이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있다. (물론 갈 길이 멀고 아직도 변화 받고 새로워져야 될 부분과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님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제자훈련이 남자성도들에게 미친 사역의 열매
1. 담임목회자와의 인격적 유통
담임목사는 목회현장을 압축해놓은 결정체이다. 제자훈련은 남자성도와 담임목사와의 불필요한 오해나 낭비적 요소를 제거하여 사역의 동지적인 일체감을 회복시킨다. 우리교회에서는 제자훈련이 끝나면 반드시 피드백(feedback)의 과정을 의도적으로 가진다. 매해마다 훈련생의 동일한 소감은 “담임목사님을 진정 잘 알게 되었고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감동적인 글을 발견한다. 이러한 진술이 결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님을 알고 있다. 제자훈련생들은 목자와 양의 관계라는 도식적인 수준에서 진정 목회의 동역자로 자기변화를 경험했다는 고백인 것이다. 제자훈련을 통한 인격적인 교감이 없는데 어찌 남자성도들의 마음을 읽어낼 것인가? 그들의 삶의 현장을 가감 없이 들여다볼 수 있을까? 담임목회자와의 튼실한 인격적 결합은 목회의 안정은 물론 교회의 격(格)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level up). 이 복잡하고 예측불허의 목회현장에서 최소한의 마음의 연대(heart tie)가 전제되지 않고 어떻게 강력한 목회를 펼쳐낼 수 있을까?
필자는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훈련생의 손을 잡고 감사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고 동역자들에게 가슴 터질 둣 표현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님을 늘 감격해하고 있다. 소통인가? 불통인가? 제자훈련의 유익 중 가장 큰 유익중의 하나는 통함이 있는 목회현장이라는 사실이다. 인격과 인격, 마음과 마음, 사역과 사역, 목회자와 성도들과의 살 깊은 만남은 제자훈련 목회자에게 허락하시는 우리 주님의 특별한 보너스라 생각한다. 담임목회자와 영적인 통함이 없이 거룩한 영적친위부대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어디에 있는가?(롬 16:3-4)
2. 훈련생 상호 네트워킹
제자훈련 원탁에 둘러앉은 훈련생은 육신의 나이, 학력, 출신지, 예수 믿은 연수, 직업, 성향, 직급, 경제가 모두 다르다. 오직 복음 안에서만 형제애의 따뜻함을 공유할 수 있다. 약간의 직급만 달라도 직장에서 근무하는 책상이나 권한이 사뭇 다르다. 남자 나이 서른이 넘어서는 사실 새로운 우정의 관계를 맺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처럼 혈연, 지연, 학연을 따지는 나라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은 이해득실의 관계위에서만 성립한다. 냉정한 사회,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감동을 창출해내는 만남이 어디에서 가능한가? 필자는 단언하건대 제자훈련의 현장이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자와의 인격적 소통은 신앙생활의 안정감의 기초를 제공한다. 동료들과의 비전의 나눔, 간증의 나눔, 생활의 나눔은 영적 생기를 가져다준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어지고 동료의 허물을 사랑을 주고받는 계기로 바꿀 수 있는 축복은 제자훈련을 통하여 수도 없이 경험하는 축복이었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파악했다. 사도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이며 동역자요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22) 인격적인 네트워킹이 이루어지지 않는 남자들은 청년의 정욕에 붙잡혀 살 수 밖에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열린 공동체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역의 궁극적인 열매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주고받고, 동역할 수 있는 사람이다.(살전 2:19-20)
3. 가정을 세우는 제사장으로 거듭나게 한다.
제자훈련은 가장이 가정에서 영적지도력을 회복하여 가정의 제사장으로 영적회복을 할 수 있도록 눈을 열어준다. 현대가정은 시한폭탄이다. 언제 터질지 모른다. 언제 사고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음란 문화의 범람, 인터넷의 역기능, 기러기 가족, 전통가치의 붕괴, 새로운 종족(디지털시대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는)의 부상등 현대사회의 복잡한 모든 것이 축소되어 가정에 뭉쳐 있다. 마치 비빔밥을 비벼놓은 것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분별할 수 없다. 가정의 질서회복은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을 역전시키는 열쇠가 제자훈련속에 있다. 제자훈련 목회를 하면서 수많이 경험하는 것은 남자성도의 주님과의 관계회복을 통하여 그 영향력이 필연적으로 가정회복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단언한다. 제자훈련이 정상적으로 실시되는 교회는 예외 없이 건강한 가정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난다는 사실을!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건강한 가정은 집안의 가장의 회심과 훈련과 가정의 제사장으로서의 각성위에 놓여 있다.
신앙이 좋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관계를 통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원초적인 인간관계는 가족간의 관계이다. 제자훈련 덕분에 부인집사들로부터 인사를 받곤한다. “목사님 제 남편훈련 잘 시켜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예전과는 달리 요즘 우리집이 천국이예요!” 당연한 말 아닌가. 가정의 회복을 볼때마다 온 몸에 보람의 엔돌핀이 뿜어져 나온다.
제자훈련의 본질이 무엇인가? 사랑회복운동이 아닌가. 강한 남자하는 의미는 가부장적 권위로 군림하여 가족을 노예처럼 부리는 가장이 아니다. 진정 강한 남자는 가정의 영적 지킴이와 보호자 그리고 공급자로 자신의 몫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남자이다. 제자훈련은 남자성도를 가정의 섬기는 제사장과 사랑으로 이끄는 왕으로서 신분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
4. 남자성도가 교회이미지를 새롭게 한다.
최근 서울교육청에서는 여교사가 차지하는 퍼센트가 과다하다 판단하여 남자교사들의 비율을 30%로 늘리는 정책을 제시한 후 다양하게 여론이 조성되고 있다. 오늘의 무너져 내리는 교육현장을 바라보면서 교육청이 제시한 고육지책이다. 여성화에 대한 우려이다. 이런 현상이 교회안에서는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의 여성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어왔다. 숫적인면에서 열세인 남자성도의 현실은 이미 오래 되었다. 예배시간 특히 주일저녁이나 수요일 저녁예배를 주목해 보라.
구역(다락방) 참석자를 남녀 비율을 생각해 보라. 교회가 남자성도를 영적으로 활성화시키지 않으면 목회적인 빈익빈 현상이 반드시 나타난다. 남자성도들이 스스럼없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여성 중심적인 분위기를 일신할 필요가 있다. 남자 성도가 교회내에서 운신의 폭이 계속적으로 좁아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활력을 회복하는 선순환의 새로운 역사의 장이 펼쳐지기 위해서는 남성목회에 도움이 되는 계기가 필요하다. 바로 그 계기는 제자훈련 사역이 되어야 하리라. 남자성도를 깨우는 사역에 집중해야 하리라. 아버지학교를 비롯한 남자성도 조찬 성경공부, 남자성도 특별목적 집회를 이야기하지만 핵심사항은 같다. “훈련된 남자성도가 열쇠라는 사실이다.” 어떤 사역을 펼쳐 간다해도 역시 그 중심에는 어떤 사람이 포진해있는가의 문제이다. 목회는 마치 눈덩이를 만드는 것과 같다. 큰 눈덩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눈덩이의 핵(core)에 해당하는 첫 눈뭉치의 강도가 높아야 한다.
첫 번 눈덩이를 뭉칠때의 견고함이 사역의 깊이와 넓이를 결정한다. 제자훈련은 첫 번 눈덩이의 강도를 결정하는 목회의 종합예술이다. 예수님안에 모든 보화가 숨겨져 있듯, 제자훈련안에는 목회 현장의 건강을 도모하는 DNA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은 남자성도를 깨우므로 교회는 물론 가정과 직장생활의 건강으로 연결하는 훈련의 종합비타민제이다. 본질에 충실하면 나머지는 자연스레 따라오기 마련이다.
남자성도들이 견고하게서는 교회는 반드시 그 지역사회에서 이미지가 높아지고, 교회다운 품격을 갖추어 많은이들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게 되어 있다.
필자는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마치고 심야에 각자 집을 향해 꼬리에 꼬리를 이어 차를 운전하며 돌아가는 남자훈련생 집사들의 모습을 배웅하면서 감격에 젖었던 경험이 한 두번이 아니다.
“주님, 이렇게 복된 만남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런 재미가 아니면 어떻게 기쁨으로 목회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목회의 감동과 기쁨이 필자만의 고백이 아니기를 소원해 본다.
주여! 강건한 남자성도를 세우는 목회자가 되게 하소서!
주여! 기드온의 300용사처럼 세상을 주님께로 돌릴 십자가의 정병을 허락하소서!
* 오정호목사는 대전새로남교회 담임목사이며 OM국제선교회 대전이사장과 GMP개척선교회 대전이사장, 학원복음화협의회 대전충청공동대표와 대전CBS기독교방송 운영이사장으로 사역에 임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전기독교연합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장으로서 구원파 박옥수씨와의 대법원 소송중에 있다.
1. 깨어 있는 성도가 되라(Be on the alert)
2. 믿음에 굳게 선 성도가 되라(Stand firm in the faith)
3. 남자다운 성도가 되라(Act like men)
4. 강건한 성도가 되라(Be strong)
5.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성도가 되라(Do everything in love)
우리 성경에는 “남자답게 강건하여라”로 번역이 부사처럼 되었지만 원의미는 동사로 “남자다워라”이다. 그렇다면 남성다움이란 무엇인가? 곧 강건함이 있는 성도가 되라는 말과 연결된 것으로 보아 믿음에 굳게 선 성도는 강건한 성도이며 동시에 남성다운 성도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남자답게”의 남자는 성인남자나 남편을 가리키는 남자이다. 곧 힘의 상징으로서의 남자이다. 교회는 남자성도와 여자성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가 강건한 남자 성도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주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초대교회가 처한 사회적, 영적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속화된 헬라로마문화의 바탕에서 복음진리가 꽃피기 위해서는 신앙의 강력한 공동체가 필요했다.
또 한가지 이유는 고린도교회내의 형편이었다. 교회내의 파당 짖기로 인한 분쟁, 성적문제, 세상법정 송사문제, 우상제물문제나 부활교회문제 등 교회의 본질을 약화시키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를 정면돌파(breakthrough)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영적 강건함이 필요했다.
아마 사도의 머릿속에는 로마의 정예군사의 모습이 그려졌으리라 생각한다.
최근 개봉된 영화 “300”을 마음먹고 관람했다. 기도온의 300용사의 이미지와도 일맥상통한 것이 동기가 되었지만 명색이 제자훈련 하는 목사로서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을 대항하여 온 몸으로 막아선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을 통하여 도전과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주님의 명령에 죽기까지 복종하며 교회의 순결함을 위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의 자리를 묵묵히 충성을 다하여 지켜내는 성도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상의 위협과 도전에 조금도 움츠리지 않고, 성도의 본분을 수행해내는 모습은 얼마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인가!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사도바울과 예수님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었다.
강건한 성도는 훈련의 열매이다
강건한 성도는 단번에 세워지지 않는다. 설령 불같은 성령체험이 있다하더라도 전인격적으로 집중하여 훈련된 삶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를 지적으로 수용하는 진리의 의식화훈련과 말씀의 삶의 적용을 통한 체질화와 생활화의 단계를 통하여 자신을 지키고, 맡겨진 영혼을 세울 수 있는 갖추어진 성도로 다듬어지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는 심혈을 기울여 제자훈련에 매진하셨다.
사도바울도 동일한 길을 걸어갔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치고 그저 적당히 되는 일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의 머리를 잡고 불이 내리도록 안수기도하시면 되지 구태여 여러해 동안 데리고 다니시면서 훈련시키는 고생을 왜 하셨을까 의아해 하기도 한다.
이들의 논리는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그것하나 해결 못하시겠느냐는 논리이다. 사람은 공업 생산품이 아니다. 제품이나 상품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인격이다. 인격을 빚고 다듬어가는 작업은 기계로 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사랑의 쏟아부음과 인격적인 상호작용을 통하여 한 사람의 전인적인 성장이 이루어진다. 필자는 논산훈련소 28연대 출신이다. 왜 논산교육소라고 하지 않고, 논산훈련소라고 부르는가?
지식의 전달이나, 마음가짐의 새로움으로 나타나는 동기의 출발은 순간 혹은 수일내에 이루어 질수 있다, 그러나 교육과정이나 목표가 체질화되기 위해서는 훈련과정을 생략하고는 불가능하다. 필자는 새로남교회에 부임한수 1년여의 제자훈련을 위한 정제작업후에 제자훈련을 한해도 거스르지 않고 현장목회를 지향해 왔다. 그런데 훈련을 하면 할수록 더욱 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 이유는 제자훈련 11년 동안 제자훈련목회자로서 눈이 열려 잘 보이 지 않던 부분이 계속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요즘 새로운 사역을 위하여 과거의 사역을 돌아보면서 속으로 외치는 말이 있다.
“내가 만약에 제자훈련 목회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 과연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제자훈련하지 않는 목회자들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저렇게 버티고 있는 걸까?” 물론 필자의 마음속에는 교회사이즈에 연연하는 것보다 교회의 건강성에 무게를 두고 있음을 알고 싶다. 놀라운 사실은 건강한 교회 곧 건강한 성도를 꿈꾸다보니 교회사이즈는 보너스로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지난 수년 동안 목회현장에서 예배당 건축을 통한 목회 외연의 확장과 성도수의 증가 및 내적인 성숙의 열매를 통한 하나님의 주체할 수 없이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있다. (물론 갈 길이 멀고 아직도 변화 받고 새로워져야 될 부분과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님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제자훈련이 남자성도들에게 미친 사역의 열매
1. 담임목회자와의 인격적 유통
담임목사는 목회현장을 압축해놓은 결정체이다. 제자훈련은 남자성도와 담임목사와의 불필요한 오해나 낭비적 요소를 제거하여 사역의 동지적인 일체감을 회복시킨다. 우리교회에서는 제자훈련이 끝나면 반드시 피드백(feedback)의 과정을 의도적으로 가진다. 매해마다 훈련생의 동일한 소감은 “담임목사님을 진정 잘 알게 되었고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감동적인 글을 발견한다. 이러한 진술이 결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님을 알고 있다. 제자훈련생들은 목자와 양의 관계라는 도식적인 수준에서 진정 목회의 동역자로 자기변화를 경험했다는 고백인 것이다. 제자훈련을 통한 인격적인 교감이 없는데 어찌 남자성도들의 마음을 읽어낼 것인가? 그들의 삶의 현장을 가감 없이 들여다볼 수 있을까? 담임목회자와의 튼실한 인격적 결합은 목회의 안정은 물론 교회의 격(格)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level up). 이 복잡하고 예측불허의 목회현장에서 최소한의 마음의 연대(heart tie)가 전제되지 않고 어떻게 강력한 목회를 펼쳐낼 수 있을까?
필자는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훈련생의 손을 잡고 감사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고 동역자들에게 가슴 터질 둣 표현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님을 늘 감격해하고 있다. 소통인가? 불통인가? 제자훈련의 유익 중 가장 큰 유익중의 하나는 통함이 있는 목회현장이라는 사실이다. 인격과 인격, 마음과 마음, 사역과 사역, 목회자와 성도들과의 살 깊은 만남은 제자훈련 목회자에게 허락하시는 우리 주님의 특별한 보너스라 생각한다. 담임목회자와 영적인 통함이 없이 거룩한 영적친위부대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어디에 있는가?(롬 16:3-4)
2. 훈련생 상호 네트워킹
제자훈련 원탁에 둘러앉은 훈련생은 육신의 나이, 학력, 출신지, 예수 믿은 연수, 직업, 성향, 직급, 경제가 모두 다르다. 오직 복음 안에서만 형제애의 따뜻함을 공유할 수 있다. 약간의 직급만 달라도 직장에서 근무하는 책상이나 권한이 사뭇 다르다. 남자 나이 서른이 넘어서는 사실 새로운 우정의 관계를 맺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처럼 혈연, 지연, 학연을 따지는 나라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은 이해득실의 관계위에서만 성립한다. 냉정한 사회,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감동을 창출해내는 만남이 어디에서 가능한가? 필자는 단언하건대 제자훈련의 현장이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자와의 인격적 소통은 신앙생활의 안정감의 기초를 제공한다. 동료들과의 비전의 나눔, 간증의 나눔, 생활의 나눔은 영적 생기를 가져다준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어지고 동료의 허물을 사랑을 주고받는 계기로 바꿀 수 있는 축복은 제자훈련을 통하여 수도 없이 경험하는 축복이었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파악했다. 사도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이며 동역자요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22) 인격적인 네트워킹이 이루어지지 않는 남자들은 청년의 정욕에 붙잡혀 살 수 밖에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열린 공동체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역의 궁극적인 열매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주고받고, 동역할 수 있는 사람이다.(살전 2:19-20)
3. 가정을 세우는 제사장으로 거듭나게 한다.
제자훈련은 가장이 가정에서 영적지도력을 회복하여 가정의 제사장으로 영적회복을 할 수 있도록 눈을 열어준다. 현대가정은 시한폭탄이다. 언제 터질지 모른다. 언제 사고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음란 문화의 범람, 인터넷의 역기능, 기러기 가족, 전통가치의 붕괴, 새로운 종족(디지털시대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는)의 부상등 현대사회의 복잡한 모든 것이 축소되어 가정에 뭉쳐 있다. 마치 비빔밥을 비벼놓은 것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분별할 수 없다. 가정의 질서회복은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을 역전시키는 열쇠가 제자훈련속에 있다. 제자훈련 목회를 하면서 수많이 경험하는 것은 남자성도의 주님과의 관계회복을 통하여 그 영향력이 필연적으로 가정회복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단언한다. 제자훈련이 정상적으로 실시되는 교회는 예외 없이 건강한 가정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난다는 사실을!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건강한 가정은 집안의 가장의 회심과 훈련과 가정의 제사장으로서의 각성위에 놓여 있다.
신앙이 좋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관계를 통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원초적인 인간관계는 가족간의 관계이다. 제자훈련 덕분에 부인집사들로부터 인사를 받곤한다. “목사님 제 남편훈련 잘 시켜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예전과는 달리 요즘 우리집이 천국이예요!” 당연한 말 아닌가. 가정의 회복을 볼때마다 온 몸에 보람의 엔돌핀이 뿜어져 나온다.
제자훈련의 본질이 무엇인가? 사랑회복운동이 아닌가. 강한 남자하는 의미는 가부장적 권위로 군림하여 가족을 노예처럼 부리는 가장이 아니다. 진정 강한 남자는 가정의 영적 지킴이와 보호자 그리고 공급자로 자신의 몫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남자이다. 제자훈련은 남자성도를 가정의 섬기는 제사장과 사랑으로 이끄는 왕으로서 신분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
4. 남자성도가 교회이미지를 새롭게 한다.
최근 서울교육청에서는 여교사가 차지하는 퍼센트가 과다하다 판단하여 남자교사들의 비율을 30%로 늘리는 정책을 제시한 후 다양하게 여론이 조성되고 있다. 오늘의 무너져 내리는 교육현장을 바라보면서 교육청이 제시한 고육지책이다. 여성화에 대한 우려이다. 이런 현상이 교회안에서는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의 여성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어왔다. 숫적인면에서 열세인 남자성도의 현실은 이미 오래 되었다. 예배시간 특히 주일저녁이나 수요일 저녁예배를 주목해 보라.
구역(다락방) 참석자를 남녀 비율을 생각해 보라. 교회가 남자성도를 영적으로 활성화시키지 않으면 목회적인 빈익빈 현상이 반드시 나타난다. 남자성도들이 스스럼없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여성 중심적인 분위기를 일신할 필요가 있다. 남자 성도가 교회내에서 운신의 폭이 계속적으로 좁아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활력을 회복하는 선순환의 새로운 역사의 장이 펼쳐지기 위해서는 남성목회에 도움이 되는 계기가 필요하다. 바로 그 계기는 제자훈련 사역이 되어야 하리라. 남자성도를 깨우는 사역에 집중해야 하리라. 아버지학교를 비롯한 남자성도 조찬 성경공부, 남자성도 특별목적 집회를 이야기하지만 핵심사항은 같다. “훈련된 남자성도가 열쇠라는 사실이다.” 어떤 사역을 펼쳐 간다해도 역시 그 중심에는 어떤 사람이 포진해있는가의 문제이다. 목회는 마치 눈덩이를 만드는 것과 같다. 큰 눈덩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눈덩이의 핵(core)에 해당하는 첫 눈뭉치의 강도가 높아야 한다.
첫 번 눈덩이를 뭉칠때의 견고함이 사역의 깊이와 넓이를 결정한다. 제자훈련은 첫 번 눈덩이의 강도를 결정하는 목회의 종합예술이다. 예수님안에 모든 보화가 숨겨져 있듯, 제자훈련안에는 목회 현장의 건강을 도모하는 DNA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은 남자성도를 깨우므로 교회는 물론 가정과 직장생활의 건강으로 연결하는 훈련의 종합비타민제이다. 본질에 충실하면 나머지는 자연스레 따라오기 마련이다.
남자성도들이 견고하게서는 교회는 반드시 그 지역사회에서 이미지가 높아지고, 교회다운 품격을 갖추어 많은이들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게 되어 있다.
필자는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마치고 심야에 각자 집을 향해 꼬리에 꼬리를 이어 차를 운전하며 돌아가는 남자훈련생 집사들의 모습을 배웅하면서 감격에 젖었던 경험이 한 두번이 아니다.
“주님, 이렇게 복된 만남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런 재미가 아니면 어떻게 기쁨으로 목회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목회의 감동과 기쁨이 필자만의 고백이 아니기를 소원해 본다.
주여! 강건한 남자성도를 세우는 목회자가 되게 하소서!
주여! 기드온의 300용사처럼 세상을 주님께로 돌릴 십자가의 정병을 허락하소서!
* 오정호목사는 대전새로남교회 담임목사이며 OM국제선교회 대전이사장과 GMP개척선교회 대전이사장, 학원복음화협의회 대전충청공동대표와 대전CBS기독교방송 운영이사장으로 사역에 임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전기독교연합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장으로서 구원파 박옥수씨와의 대법원 소송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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